목포는 시작의 땅이다. 열차에 몸을 맡겨 긴 시간 휴식 없게 달려 온 여행자는 항구 목포의 땅을 밟는다. 이윽고 여행자는 자연과 희미한 애수를 느낀다. 자신도 자연스럽게 노래해 버리는 목포의 눈물. 여기는 호남선(湖南線)의 종착역. 목포.
(호남 태평양 뒤로 유들산이 당당히 선다 보세요 서세요 아침 희미해져)
...운운과의 목포시민 노래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다. 그러나 풍경은 지금도 옛날도 동일하다. 당시는 인구 10만의 항구도시로 일본 본토와의 중계 기지와 중국 본토와의 교역으로 다망했던 시대가 있었다. (현재는 쇠퇴하고 있지만 인구만은 증가해 26만. 광범위로서는 220만) 주위는 다도해에서 간조와 만조의 차이8~9미터. 황해(黄海)에 접하고 있으므로 해수가 불러 글자대로 황색으로 탁해지고 있다. 그리고 간만때에는 나루토(鳴門)의 소용돌이 이상의 소용돌이가 각처에 출현한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이것 또 볼 수 할 수 없는 것이 특징으로 어느 노래로 유명한 진도(珍島)도 그 구역이 되어 있다. 썰물때는 육지가 계속 되게 되는 것도 그만큼 불가사의는 없는 현상이다. 거기에 따라 간조때에는 부근의 섬들이 진흙 위에 당당히 앉아 있다. 그 넓은 진흙 평원에서는 무수한 짱뚱어가 뛰어 오르듯이 뛰고 있다. 사람의 기색을 헤아리면 일면에 소리를 내 재빠르게 진흙구멍에 퇴피한다. 해산물의 보물의 산이다.
그때 부터 목포를 떠나 약50년. 반세기도 경과하고 있다. 비참한 한국 전쟁. 그리고 남북 분단. 굉장할 만큼의 정변. 그 땅의 진짜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 예를 들면 그 박(朴)대통령을 취해 봐도 상상할 수 있다. 일본 시대에는 군인으로서 만주국군의 엘리트가 되어 다음에는 일본 육군의 사관학교 입학해 일본 패전이 되어 미국류의 훈련을 받아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한국 육군 창시자가 되어 마침내는 대통령에까지 올랐다. 이것은 최상부의 사례이지만 일반 민중에게도 나의 모르는 격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지배자 일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모처럼 한국에 방문해도 전혀 상대로 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일말의 불안이 남는다. 편지 왕래로 알게 된 심(沈)씨를 의지하여 먼저 부산 비행장에 도착. 시가(市街) 그리고 항구는 일변하고 있었지만 응시하면 옛 원형이 희미하게 잔류하고 있다. 그 대륙 독특한 냄새는 옛날 그대로다. 그것보다 반세기만에 재래했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 관광객과는 전혀 감정이 상이하고 있을 것이다. 호텔에 숙박하고 그 감정의 일부로서 자기류로 한조각의 시를 작성했다.
”生受けはぐくんだこの大地 再びまみえた 愛しさに 胸の高まり いかんせん もくげの匂いも懐かしさ 君と行こうか 絆を組んで 永久に解くな 日韓の道”(생을 받아 자란 이 대지. 다시 보인 사랑스러움에. 가슴도 고조도 어쩔 수 없다. 무궁화의 냄새도 그립다. 너와 갈까 정을 짜. 영구히 풀지 말아라 일한의 길.)
이튿날아침 통역의 심(沈)씨와 고속버스로 목적지인 목포에 출발한.(그는 패전까지 나가사키(長崎)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어는 충분). 당시는 항공로 미완성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약400킬로미터 이상 있다. 조선은 가로폭의 거리가 크다. 당분간 지나 심(沈)씨가 먼저 말했다「일본에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간사하다!」 네? 무엇입니까? 「생각해도 보세요. 우리가 생사를 나눈 한국 전쟁때 일본만 돈벌이만 하고. 정말로」 저것은 일본이 관련된 전쟁이 아니다. 일본은 전혀 관계없었던 전쟁이에요 라고 해도 납득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밖에 그 전쟁을 모른다. 실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 때 어떻습니까? 심(沈)씨 「그 때 나는 미군 방위의 최전선 부근에 있었지만 미B29폭격기가 무수한 폭탄을 투하했으므로 우리 일반 민중도 심대한 피해를 받았다. 저쪽에 목만이 날아가고 있는 팔만 나무에 매달려 있다. 융단 폭격을 먹었던 것이다. 나는 산중에 피난해 무사했지만 친척 그렇게 해서 지인이 무수 그 희생이 되었다」 이것은 제이차 세계대전때 대공습 된 것과 동일했던 것이다. 전쟁은 위정자의 행위 하나로 대중이 끔찍한 피해를 받는다. 일본은 지금은 평화로워. 이제 필요 없다. 전쟁은.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당신들조선은 대단한 고난의 길을 걸어 왔지. 일본 시대에는 그 제이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받고 일본 패전 후는 독립한 것은 좋았지만 친일파의 일소 지금까지 나라 때문에 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은 일본 때문에. 정말로 괴로웠었지요. 특히 일본 시대에 경찰관이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이다. 딱하다. 그렇게 해서 그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 심(沈)씨 「일본에서는 이런 노래 압니까? "미국을 믿지 말아라. 소련에 속지 말아라. 일본은 또 온다. 조선인은 조심해라"」 그는 하나 더 「분단의 애가입니다. "아아 산이 춥기 때문에 올 수 없는가? 아아 흐름이 차단되어 올 수 없는가? 같은 고향의 토지인데 남쪽과 북쪽은 분단 되어 원한의 길 천리. 밤 마다 너의 모습을 구해 밤 마다 너의 모습을 구해 38도선을 방황하는" 어떻습니까. 우리 조선 민족의 마음의 일부입니다!」
고속버스는 상당한 거리를 주행하고 있다. 창 밖을 보면 옛날 봐 잊은 풍경이 점점 소생한다. 포플러 가로수에 둥지를 만들고 있는 까치의 둥지. 때때로 보이는 조선 독특한 "아이고"로 가득 찬 장의의 행렬. 그러나 제일 변화해 버리고 볼 수 없는 것은 독특한 초가집뿌리. 안보인다. 물으면 한국 정부의 중요 항목의 하나에 민가의 개선이 있어 보조도 나왔으므로 옛 초가집뿌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보고 싶으면 박물관이라면 볼 수 있겠지요」 역시 50년의 세월. 일본도 변화했지만 한국도 대변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 때문에 도중 보주(普州)에서 하차. 처음으로 큰 마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것은 전쟁을 위해 북쪽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피난했기 때문에 옛날과는 전혀 다릅니다」 점심의 조선 곁(냉면)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전혀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그 평양에서 먹은 조선 곁(냉면)과는 상이하는 것 같다. 이것은 옛 재선당시와는 대상이하고 혀가 일식에 익숙해 있고 같은 조선이라고 해도 북쪽과 남쪽에서는 식생활 문화가 상이한다. 냉면은 무엇보다도 평양 냉면이 제일이다. 찾으면 지금도 존재할까. 환상의 냉면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길거리에서 찾아낸 빵을 무리해 먹는다. 매운 식품은 문제는 아니지만 . 식당에 들어간다. 보통이라면 바람직한 냄새일 것이지만 그것이 완전히 역. 구토가 난다. 나는 대부분의 식품은 맛있게 먹지만 한국 식품만은 중대한 저항이 있다. 옛 더러운 냄새난 추억이 잔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 요리는 전부 일식 이상으로 맛있다. 비록 이야기로 일본 남자의 희망은 가옥은 양옥. 아내는 일본 여성. 음식은 중국 요리.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세계 각지에 파견된 언론인들은 표면에는 내지 않지만 음식의 고생이 무수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식품 속에서 전혀 저항없이 먹는 것은 예의 김치. 그것과 그 작은 새우.조선산은 백색으로 그것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식사도 끝나 약1시간 후. 다시 승차한다. 차내에는 다수의 승객이 있지만 모두 입다물고 있다. 일본이라면 회화로 분위기가 사는 장면이지만 상대는 전원 한국인. 그리고 회화라고 해도 일본어는 망각의 저 멀리 가고 있는 사람들. 반일적인 사상의 소유자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화는 당연히 심(沈)씨라고 회화 뿐이다. 그 돌연 생각해 낸 것처럼「저것옛날 전함 야마토가 있었겠지요. 지금의 일본은 공업력이 굉장하기 때문에 저것의 수배의 크기의 전함을 건설하고 있을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어. 제일 만약 그런 공업력이 있었다고 해도 국회의 의안 통과하지 않으면 무리. 옛 일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특히 일본은 민주국가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고 소문에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심(沈)씨「아니. 이것은 틀림없는 이야기다」라고 반격 한다! 아직도 군국 일본의 주박으로부터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각국에 있다. 덧붙여서 중국에 갔을 때「일본 남성과 결혼하고 싶다」라고 어디서 알았는지 중국 여성이 때때로 방문한다. 전원 학력도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통역에 일본은 경제력이 있으므로 그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도 있지만 저것 있었겠지요. 일본 패전이 되었을 때 일본의 여성은 미국인과 결혼하고 싶어서」 그것은 다른 이라고 말해도「아니. 확실히 그랬다」몇회 말해도 그것 밖에 회답이 없다. 러시아인「일본인은 영어도 러시아어도 할 수 있는데 모두 전혀 말하지 않는다」다르다. 할 수 없어 라고 말해도 「그런 일 없다. 할 수 있는데!」
이승만(李承晩)정권은 국회에서 반민족 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제정해 일본 시대의 친일파를 잇달아 체포했다. 이(李)정권의 각료의 96인중 34퍼센트가 친일 경험자로 경찰 상급 간부의 70퍼센트가 일본 시대에 경찰의 전력(前歴)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주된 해당자가 되어 있었으므로 국회에서 큰 소란이 되어 그 시효는 1년에 단축되어 결국 350인을 체포 221인을 기소 12인에 유죄판결이 있었다. 친일파 숙청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도 그 비난의 화살을 향해 일본 어민 폐쇄를 위해 이승만(李承晩)라인을 설정하고 일본 어민에 대해서 막대한 고통을 준 경위가 있었다. 당시는 일본 한국 모두 격동 그리고 고난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간단하게 한국 방문을 할 수 있는 것은 몽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일 감정이 충만하고 있으면 이라고 하는 염려도 불식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가득하다. 이튿날 아침 어제 소개된 이(李)교장보다 친절하게도 전화가 있어「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갈 것이다」 응? 누군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약간 잠시 후 그 남자는 왔다. 전신에 미소를 띄워 나의 얼굴을 본다. 나의 머릿속은 극도로 급회전했다. 그렇게 해서 50년전의 기억이 나왔다. 그다. 그에게 틀림없다. 그 일본 이름 야마모토(山本)군이다. 야마모토(山本) 함대다. 당시 적은 조선인 학생과 자리가 전후 하고 있었다. 이름이 함대라고 하므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을 흉내내고 사령장관이라고 별명을 붙여 서로 장난치고 있던 관계였던 것이다. 공간을 뛰어넘은 재회. 서로 얼싸안아 그리고 단단한 악수. 지금은 국적이 상이하지만 그 울타리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서(徐)씨의 소개로 잇달아 목포의 요인을 소개되었다. 아아 우호. 그리고 우호. 오후 이(李)교장과 남자교의 교장의 임(任)교장. 이 사람 정말로 포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 분도 훌륭한 일본어로 회화한다. 나는 일본의 시골에 가면 방언이 많아 같은 일본인인데 선생님의 일본어보다 서투른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각 선생님은 일본의 방언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미시마(三島)씨. 당신의 아버지 알고 있어요!」 왜? 시대도 반세기 이상전의 일인데. 「아니 당시 당신의 부모는 당지 목포에서 무선국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저명인의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 발언이나 행동등이 각처에 반영하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언제나 말버릇같이"일본인이나 조선인도 관계없다. 모두 같은 일본인이니까 바보취급 해선 안 되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발언은 당시 아이였던 나에게도 짐작이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재회의 동지 徐 漢泰씨(왼쪽)
서(徐)씨와 통역의 심(沈)씨 그리고 나이지만 여기에서는 통역 불필요하다. 선생님이 말하는데는「내일 고등학교와 중학과 초등학교의 학생을 전원 집합시켜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 그래서 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미시마(三島)씨는 단상에 올라 단지 경례를 해 주면 좋습니다」 놀랐다. 이 정도 환영해 주는 일. 이것이 진짜 예비 지식 제로라고 할지도 모른다. 무례하게 거절할 수도 없다. 또 하나 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사례는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생에 두 번 다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에게도 이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한 싶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내년으로 해 주세요 라고 설명해 이번은 사퇴하는 것으로 했다.

왼쪽에서 목포 고교 교장. 교감. 저자. 통역의 沈씨
그 후 귀가하고 사정을 처에게 설명했다. 처 말하는데는「나는 조선에 간 적도 없고 냄새난 괴로운 나라에 가고 싶지 않다」 착각도 뛰어넘고 대착각의 연속이다. 나는 대실망했다. 이런 착각이 사라지지 않으면. 처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동일 감정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한국민의 입장이 되면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우호의 제일보는 이것이 원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동급생에게 그 퍼레이드를 연락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명이 방한. 거기에 오사카(大阪)TV도 수행해 그야말로 대대적으로 신문에 게재된 일을 들었다. 좋았다 좋았다. 일한 우호의 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한 합동의 동창회
아아 목포야 목포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일주일간 체재. 귀국을 위해 또 고속버스에 승차하지만 장거리이기 때문에 피로가 더해졌기 때문에 도중 쥰텐(順天)에서 일박한다. 황혼 눈앞이 번화가이므로 볼만하게 간다. 책의 노점을 구경. 뭐라고 책의 3비율은 일본의 책이다. 당시는 일본 문화가 해금되어 있지 않은 시기였는데. 또 버스 정류장에서는 반드시 일한의 사전이 판매되고 있었다. 표면에서는 시끄러운 일 말해도 대중에게는 일본의 모습이 상당히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아침 고혈압 때문에 약을 낸다. 곁에서 보고 있던 한국의 아줌마「이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통역의 심(沈)씨에게 설명을 부탁한다. 들은 아줌마「나도 고혈압으로 곤란해 하고 있으므로 부디」라고 고개를 숙인다. 현재는 불명하지만 당시는 일본과 달리 건강 보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 아마 아들일 것이다. 나와「안된다」라고 손을 흔든다. 그것도 의혹으로 가득 찬 눈초리가 굉장하다. 역시 대중은 이런 것이다. 목포가 특별했던 것이다. 이것을 근절로 하고 처음으로 일한우호다. しか그러나 마을을 산책해도 아무런 불쾌감은 생기지 않는 느낌. 이것이 공산국이라면 방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각처에서 표정도 가지각색이다.
거기에는 상당 년월을 경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씨만으로는 안된다. 부산 도착. 서두르므로 횡단 육교를 건넌다. 다리의 도중에 무엇인가 이상한 여자가 있다. 곁에 가면 한눈에 알았다. 그 원폭증의 여자다. 私は나는 처음으로 이 비참한 상태를 보았다. 몸 가득 그 케로이드다. 발버둥 쳐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이 때 정도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어디의 여자였는지 모르지만 불쌍하게. 전쟁 때문에 이렇게 끔찍한 모습을 쬐고 있다! 깊게 파고 들면 아직도 아직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우호는 없다 라고 절실히 느꼈다.
희비 여러가지. 한국이야. 영구히 공존. 게다가 우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