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의 조선 이야기

Japanese | Korean

제6부 필사의 38도선 돌파 그리고 자유권에 도달

길고 비참한 엄한도 지나 기분만은 약간 누그러지는 4월이 왔다. 아직도 귀국의 이야기는 소문도 없었다. 이 때 조금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예의 그렛서이다. 어느 날4~5인의 동료와 함께 자택에 왔다. 한 명은 그보다 상관인 느낌이다. 무슨 일인가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러 왔는지 라고 생각했지만 다르다. 그가 설명하는데는「일본은 패전이 되고 지금 일본에 귀국해도 원자력 폭탄 받아 살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장래는 일본에서 미국을 쫓아버려 "트우키요 다와이"(점령)할지도 모른다. 너는 훈련하면 훌륭한 소련군의 병사가 될 수 있다. 물론 학교도 모두 국가가 돌본다. 나도 부모님이 없다. 그런데도 소련 국가를 믿었기 때문에 너도 알고 있는 대로 간부가 될 수 있었다. 파파 그리고 마마야 당신의 아들을 침략군의 군인은 아니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군인으로 해 주지 않는가!」 동행의 병사 한결같게 "하라쇼 오틴하라쇼"(좋은 매우 좋다) 이것에는 곤란했다. 일본인인 나이지만 귀국해도 친구나 학우등 전혀 없다. 게다가 졸업한 학교는 있을 리가 없다. 만약 나에게 부모 형제가 없게 천애고독의 몸이라면...라고 머리를 지나가지만, 그러나 패전했다고 말해도 일본인이다. 그들은 계속해 말하는「만약 희망한다면 당장이라도...그렇게 해서 너의 부모 형제는 특별 대우로 귀국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 귀국해도 소련 방문은 간단해」 나는 머리가 혼란했다. 말로 할 수 없다.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무언인 채 였다. 그리고 그들은2~3회방문했지만 나는 같은 태도. 결국 그들은 단념한 것 같다. 오지 않게 되었다. 일본인의 젊은이의 중에는 동조해 소련군에 들어간다. 당연히 국적도 일본국적을 이탈한다. 지금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이를 먹어 망향의 생각이 더해가고 있을지도 모르다...

확정한 인양의 이야기도 소문만 선행해서 혼돈되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가끔씩은 소련 급여도 있었지만 최근 군사시설 부근은 경비가 엄중해서 숨어 아는 사람이 된 "로스케"택을 방문한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은 모험이다. 요소 요소에서는 자동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경비의 임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총구가 불을 토한다. 모험이라고 태평한 말을 하는 때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에 비집고 들어가면 안심하고 그 긴장감은 사라진다. 이것은 습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로스케 자택의 뜰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통행중의 병사가 가끔 농담을 섞고 회화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보통으로 도로를 통행 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깨달아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신중하게 신중을 거듭했지만 결국 나도 포함해 동료 3명 모두 체포에 있었다. 동행이다. 안된다! 시베리아! 머릿속에서 소리를 내 빙빙 돈다. 30분이나 연행되었을 것인가. 전일본군의 방공호자취에「넣어!」 반 억지로 수용된다. 암중 응시하면 내부에 우리와 같은 일본인이 약20명 정도 있다. 전원 우리와 동일 의견. 설마 총살은 없을 것이다!「나에게는 처자가 있다. 죽을 수는 없다!」 비관 또 비관의 연속. 약4시간후 문이 열렸다. "나와라"의 명령. 암야에 익숙한 눈에는 태양이 눈부시다. 거기는 비행장의 한쪽 구석. 전원 정렬. 책임자다운 장교가 곧바로 하늘로 향해서 실탄 일발 발사. 굳어진 얼굴로「카피탄 스마트리 포크!(내가 발견하면 공격한다)」 그렇게 해서 간단하게 방면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장소는 비행장. 평화시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중요 군사시설의 일부이므로 원래 가는 것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비행장은 코이즈미(小泉)총리가 김정일(金正日)회견에서 착륙한 공항) 그 이후 쓸데 없고 오히려 위험이 수반하므로 자연스럽게 가지 않게 되었다.

7월이 되면 과연 더워졌다. 그러나 여기는 북국. 나무 그늘에 잠시 멈춰서면 시원해진다. 친구의 전(全)군은 이전 정도는 아니지만 이따금 와 준다. 나도 언제 여기를 탈출할까 불명하지만 이 때 자칭 나의 보물을 전(全)군에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자택에 전부 반입했다. 예의 낡은 금전. 30센치정도의 철제의 불상. 이 불상은 그것보다 10년전에 아버지가 신의주(新義州)에서 파낸 것으로 조선인으로부터 구입한 물건이다. 들어 올리면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제작 연월일도 확실하지 않다. 지인들은 안에 돈이 있는 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주었다. 「미시마(三島)군!」 그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한다. 「군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로 괴롭다」 이렇게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귀국처는 여기가 될 것이다 라고 본적을 기입했다. 그러나 귀국후도 현재까지 전(全)군으로부터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귀국후도 그의 모습을 추구한 날들이 계속 되었다. 어느 밤 어머니가 돌연 일어나 「아키라(昭)! 무서운 꿈을 꾸었다」무슨꿈이었습니까? 「그것이 전(全)씨가 총살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아무리 꿈이라고 말해도 불안하게 된다. 이것은 확실히 1950년에 한국 전쟁의 무렵이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신문지상에 "북쪽에서의 망명자가 미군의 맹공으로 함락 직전의 평양(平壌)의 대동강(大同江)하반에서 정치범 500명을 총살로 했다" 라고 하는 기사가 있었다. 꿈과 이 기사. 웬지 모르게 부호 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현실이라면 나는 일본인으로 그는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그 운명이 정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나의 마음의 상처에 걸리고 있다! 만약 생존하고 있으면 만나고 싶은 마음의 친구 전(全)군!

8월초순이 되면 평양 이외로 탈출의 소문이 이따금 귀에 들려온다. 그토록 무수히 있던 일본병도 모두 사라졌다. 아마 시베리아일 것이다. 그 생각해 내는 것도 싫은 굴욕의 8월15일이 또 온다. 임시 혁명정부는 그 수립을 위해 기술력이 있는 일본인 목수를 가능한 한 모집하고 그 건설에 여념이 없다. 소련식의 독살스러운 그 원색의 아치가 그 상징이다. 전일본군지원병도 일본식의 군복으로부터 새로운 군복으로 변화하고 있다.

친애한 지도자 김일성 동지 만세 우리 나라 만세!

정치의 대변혁 행복인지 불행인지 일생에 두 번 볼 수 없는 듯한 광경을 눈앞에 깊게 새길 수 있던 이 일년이었다.

38 도선. 이것이 귀에 들려오면 지금도 공포와 전율이 흐른다. 평양으로부터 남선(南鮮 : 현재의 한국이지만 당시는 이 표현)의 개성(開城)까지는 160킬로미터. 자동차 시대의 현재는 먼 거리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와 현재는 생각도 물론이지만 척도가 모두 상이한다. 도로라고 해도 구부러진 도로가 많고 게다가 포장 도로같은 최신의 도로는 불과 일부 밖에 없다. 폭의 좁은 울퉁불퉁 길. 트럭은 목탄차로 마력(馬力)은 현재의 자동차의 몇분의1. 따라서 오르막을 주행하면 역부족으로 마침내는 정지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초기의 38도선의 표지

꿈에까지 본 인양이라고 하면 말은 좋지만 이것은 형편의 좋은 탈출이다. 탈출이라고 해도 트럭의 승차는 무료는 아니다. 그 자금 만들기가 제일보였다. 한 명 2000엔. 그것도 완전한 군표. 100엔은 통칭 가격표 10엔은 녹색 그리고 5엔은 갈색이다. 통화에 신용이 있으면 조금 정도 주름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신용성이 불명하면 조금의 상처가 있어도 부도에 가까운 상태가 되므로 그것을 받을 때에는 신중이 필요했다. 필사적으로 그 자금 만들기.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보로 가는 방법 밖에 없다.

그리고 곤란을 다한 인양도 암묵의 승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에 소련군의 허가 거기에 북한 정권의 이해. 승인이라고 해도 그 하부의 승인도 필요하다. 선교(船橋) 서평양(西平壌) 평양(平壌)의 각 보안소가 그것이다. 그것은 일본인회의 필사적인 탄원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북한 수반의 김일성(金日成)도 꽤 이야기를 알아 주는 인물이었던 일도 성공의 요인이 된 것 같다. 「탈출은 간단하게는 할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묵인했던 것이다」란 당시 그 건에 해당된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로 지금도 선명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 날의 저녁때 대망의 어둠 트럭이 도착. 모두 벌레같이 짐받이에 모여 승차한다. 소지품은 안전지대까지의 필수품. 굳이 표현한다면 거지봉투를 모았을 뿐이다. 아이도 포함해 약60명. 이것에 승차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 필사적이다. 초가을의 황혼은 순식간. 암야안 트럭은 째지는 소리를 올리면서 주행한다. 전방으로 간단한 목제 게이트 출현. 그것을 단번에 튀겨 치워 주행. 아득히 저 쪽에서 소련 군병사가 우왕좌왕 하고 있다. 누군가가 「덮어라」암야에 섬광이 두상을 달린다. 주행 잡음 중에서 깊은 한숨이 각처에서 일어난다. 안심감의 한숨. 게이트의 인원은 적은 인원수였던 것이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무래도 그들은 옆의 연락이 태만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들의 애매한 임무 태도도 가산되고 있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합리하게 괴롭거나. 이것이 민족 사이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일한 게이트 통과가 2회 발생한다. 패전의 민중은 언제나 이런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전원 무사. 이것이 무엇보다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사하고 라고 비는 것 밖에 않는다.

약간 주행하면 트럭은 급정차. 하차하고 운전기사가 말하는데는「연료 부족하고 이대로는 목적지에 갈 수 없다」 연료 부족이라고 해도 부근에 인가 등 안보인다. 거기에 진정한 암야. 어쩔 수 없다. 그들도 결사적으로 운전. 무엇인가의 금품을 쥐어짜 드린다. 지옥의 소식도 금 나름. 공물이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발차. 이런 일이 2회. 그는 이 업무의 전문이야. 잠시 후 운전기사 가라사대「이번이 마지막 게이트가 된다」. 점점 등불이 접근한다. 역시 검문소다. 5~6명 있다. 소련 병사 2명 조선 병사 4명. 각자 예의 자동소총을 어깨로부터 매달고 있다. 「스트이!(멈추어라)」라고 외친다. 가져온 물건을 전부 내 넓힌다. 소지품 검사이다. 그렇게 해서 상세하게 조사이다. 우리의 소지품으로 고급품은 있을 리가 없다. 꼼꼼하게 조사. 로스케 특유인 조사하는 방법. 거기에 보조역의 조선병도 조사하고 있다. 약1시간도 경과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물건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하라쇼」합격의 싸인이 나온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막사의 한쪽 구석에 술의 병이 널려 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발밑이 조금 휘청거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출발. 전원이 스파시보(고마워요) 고개를 숙이고 트럭에 승차해 발차하는 순간. 제일 무서워하고 있던「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라)!」 가리키는 것은 뭐라고 나의 여동생이다(당시16세). 각처에서 비명이 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케가 트럭의 짐받이에 손을 걸기 시작한 순간 동승자「우리는 원래 상인이었기 때문에」라고 각자가 외쳐 뛰어 내린다. 그들과 교섭할 생각일 것이다. 어디의 출신자였구나. "동포사랑" 이런 깨끗한 말에서도 감사가 부족하다. 그러나 또 한사람 짐승화한 로스케도 떠든다. 그 때 또 다시 생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인 병사이다. 「여러분. 나는 일본인에 신세를 졌다. 그래서 답례로 여러분을 돕기 때문에 빨리 도망쳐 주세요」 어디의 누군지 모르지만 훌륭한 사람이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서 당시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는 거의 마찰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나도 그러한 마찰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단지 경찰 관계는 확실히 그러한 장면이 있었을지도 모르다. 그것보다 귀국후 모두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일본 본토에서 그 편린을 볼 수 있던 과거가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조선인이 일본인을 돕는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두손을 모아 비는 것 같다. 최대의 험한 곳은 일단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늦은 가을의 새벽이 왔다. 멍하니 밝아진 시골의 가도를 달린다. 「일본인! 져 도망치고 가는 것인가!」라고 현지의 아이들이 돌을 던져 온다. 그리고 운전기사가 고함친다. 오후. 어느 사람의 없는 길에서 휴식. 그 때 우연히 통행중의 조선인 「일본의 사람. 나 보았지만, 이것보다 조금 먼 부락에 일본인의 아이가 있어」어째서?「7세 정도의 여자 아이. 또 한사람은 5세 정도의 사내 아이」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어디에서 피난해 왔는지 모른다. 매일 거지같이 받고 있어」 어머니는 죽은 것 같다! 그러면 이라고 말했지만 슬픈 유감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그때 부터 그 두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쌍하게. 역시 붉은 피가 흐르고 있는 동포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각처에서 몇회인가 귀에 들려왔던 적이 있다.

질주중의 트럭 안에서도 친구였던 전(全)군을 가끔 생각해 낸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가 이전의 나가 아무도 없는 자택에 가서 상당히 실망한 모습이 명확하게 보이는 들린다. 얼마 안되는 년월의 친교였지만 평생 망각되지 않는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로 평양으로부터 멀어질 때 마다 왠지 모르지만 그 토지의 조선인의 태도가 좋아져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어른은 물론 그토록 심한 욕을 외친 아이들까지 언행이 부드러워진 같다. 뭐 패전전을 생각해 내도 실례인 태도나 처사등 너무 기억에 없다. 그러니까 예의 거지가 된 고아에게도 잔혹한 처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지나 운전기사「더 이상은 우리도 위험하기 때문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지금까지 어떻게든 여기까지 옮겨 와 주었으니까 라고 전원 하차. 얼마 안되는 그저 한 줌의 물건을 드린다. 운전기사는 일본인 한사람 한사람에 악수「무사하게 귀국해 주세요」라고 하고 재빠르게 떠났다. 그들도 선의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동은 생활이나 가업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하차한 장소로부터 38선까지는 약100킬로미터. 노인도 있으면 유아 그리고 아이도 있다. 그러나 도보로 갈 수 밖에 없다.

다행히 맑은 가을 하늘. 일본 맑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는 조선이므로 조선 맑음 라고 말하는 편이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태양은 아직 높다. 단체는 진행된다. 가을의 황혼은 빠르다. 다리가 있었으므로 이것 다행히 라고 다리아래를 보금자리로서 하룻밤을 보낸다. 양기도 적당한 계절이므로 모두 곧바로 숙면한다. 이튿날 아침 조속히출발. 식사는 무엇을 먹었는지 지금은 확실하지 않지만 비록 먹었다고 해도 착실한 물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 무언으로 진행된다. 평화시라면 회화도 있던 것이겠지만 여기에는 그것이 없다. 오후 나의 곁을 지팡이를 짚어 걷고 있던 할머니. 이름은 사카키바라(榊原)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 손자였지 9세 정도와 5세 정도의 여아가 함께였다. 모친과 부친다운 인물은 거기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 할머니 70세 정도였지만 돌연 지면에 앉아「 나는 이제 안된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에 나를 이대로 두어 줘. 나는 조선의 흙이 될 수 밖에 없다」 곁에 있던 손자들도 반울음으로 웅크리고 앉는다. 무엇이다 할머니 무엇을 바보같은 일 말한다. 우리가 있으니까 라고 말했지만 혼자서 짊어지는 것은 매우 무리였기 때문에 모두 기마전같이 교대하면서 할머니를 옮겼다. 그리고 다음에 또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 왔다. 지금까지 무언의 연속이었던 아이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리도 없다. 비참한 음식으로 피로가 더해져 왔던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꾸짖는다. 부모도 극한으로 피로하고 있다. 점점 휴식의 회수가 수를 늘린다. 2일째의 밤은 나무 그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3일째나 개여 있는 것은 좋지만 아이들의 불평의 소리가 한층 커져 왔던 것이다. 모두 피곤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젊은이가 아이들을 짊어졌다. 최초내가 짊어진 여자 아이 7세 정도. 짊어지면 금새 숙면. 상당히 긴장과 피로가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의 아이들도 떠든다. 30분 경과하면 아이를 내린다. 아이라도 잘 아는 말로"차례가 있으니까. 좀 더 지나면 또 짊어져 준다. 걷지 않으면 살해당한다". 여자 아이를 「알고 있다!」아이나 어른도 모두 필사적이다. 그렇게 해서 3일째의 밤도 깊어진다.

4일째. 오늘이야말로 38선 부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보다 한층 더 늘어난 피로. 필사적이다고 말하는 말에서도 표현할 수 없다. 저녁때 간신히 38선이 있는 산맥을 바라볼 수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다수의 선착자 약1000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선인의 남자가 메가폰을 가지고 외치는 「너희 일본인. 너희는 군국주의의 희생자다. 저것을 봐라」 보면 한쪽 구석의 단체 200~300명은 있었을 것인가. 모습이 굉장하다. 거지같은 옷이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나타낼 수 없다. 큰 고난의 길을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온 일이 모습에 선명하게 노출하고 있다. 저것을 보면 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들으면 신의주(新義州)로부터의 탈출자의 군중이다. 메가폰남 계속해「전원 식량을 내라」라고 명령한다. 모든 식품을 낸다. 메가폰남은「너희 불쌍하게」라고 하면서 비교적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군중에게 배포한다. 「며칠 먹지 않았어? 먹어라」말하는 남자도 울먹이는 소리로 받는 분도 울먹이는 소리. 안에는 양손을 대면시켜 「감사합니다」 두려워한 아이들에게도 분배였다.


인양시에 지참한 반합과 냄비. 이것도 도중에 팔아 버렸다

저녁때. 무서워하고 있던 비가 강해진다. 근처는 암야. 그리고 지리도 모른다. 소언덕의 저편으로 얇게 민가의 등불. 가족 전원이 손을 잡아 등불을 목표로 한다. 평양으로부터 가져온 물건은 광장에 두고 왔다. 피로로 가지고 가는 것이 무리이다. 발밑은 논일까 밭일까 산길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간신히 민가에 도착했다. 방은 외형보다 비율 넓고 게다가 거주자는 친절하다. 온돌이므로 마루는 따뜻하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나온 노파가 중얼거리는「일본인은 지금 져 돌아가지만 또 ヤンバンサラミ(부자)가 될 것이다」 그때 부터 5년도 지나지 않고 한국 전쟁이 일어나 이 장소는 "철의 삼각지대"의 명칭을 붙여질 정도의 격전 지대가 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 그토록 내리고 있던 가을비도 그쳤다. 그 광장에 남긴 물건. 모두 어젯밤의 장소를 찾고 무사히 가까스로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보다 선객이 있었다. 조선인 마누라들이 큰 바구니를 지참해 수집중이다. 바구니에 넣으면 그녀들의 권리가 된다. 그녀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몹시 서둘러 우리의 물건을 주워 모아 38선 목표로 해 경계선의 곁의 산기슭에 가까스로 도착한다. 4~5명의 소련병에 의한 소지품 검사가 있지만 의심스러운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사진류는 불가였다. 마지막에 「하라쇼!(좋다)」의 한마디. 천금의 중량감에 동일한 한마디. 드디어 돌파할 수 있다. 무언의 환희이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말로 궁핍한 시시한 물건만 먹어 생활해 왔다. 단지 이렇게 해 일단 그 탈출 트럭에 승차할 수 있던 것은 제1에 건강 2번째로 승차하는 자금의 조달. 어느 쪽이 빠져 있어도 그것은 승차 조건은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지원이라든지 보조금이라고 하는 것은 몽상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패전에 의해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이른바 유랑의 백성의 일보직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아직도 교전중이라면 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이 중요한 트럭에 승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운명은! 끔찍한 모습이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다. 인양 후 그러한 수기를 읽었던 적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보면 우리의 고난은 큰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병약자는 그대로 이향의 흙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양 직전 자택 부근에서 아는 사이의 나가사키(長崎)출신의 사이토(斉藤)씨라는 분이 계셨다. 연령은 60세 정도. 소시민적인 사람이었지만 훌륭한 세대주. 그 사람이 예의"발진 치브스"에 감염해「빠르게 나가사키(長崎)에 돌아가 그 멋진 일본의 물을 마시고 싶다」라고 재삼 이야기해지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망. 가족은 물론 여러명 계셨지만 그 후의 소식은 모두 불명하다. 또 육로를 도보로 38도선까지 가까스로 도착한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는 약3할의 사람들이 도중 일본을 생각하면서 결국 이향의 흙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증거로 최근 그 관련의 자료에 대충 훑어보았지만 38도선 부근에서도 상당한 사망자가 확인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옮겨 준 조선인의 트럭 운전기사도 선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다. 무수한 운전기사안에는 악인 운전기사도 실재해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도중에 버려지고 고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뭐 그런 일 당해도 불평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 한정하지 않고 이것이 패전국민의 말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중의 다행의 부류에 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험하지도 않은 느슨한 비탈을 오른 정상에서 경계선 돌파다. 모두 한결같게 지금까지 고난을 맛본 북쪽의 산들을 바라본다. 저기에서 고생했던 것이다. 더이상 절대로 갈 것은 없다. 지금 생각해 내는 한국의”부산항으로 돌아가라”의 노래. 나는 공산주의의 교육을 받았을 것도 없지만 자유의 땅에 피했을 때의 감정이 언제나 그 노래와 오버랩이 된다. 뭐라고 말하면 좋은가. 머리에 덮인 것이 어느새 소멸했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8 도선 돌파의 감격도 한층 더 하게 이번은 느슨한 산길을 내린다. 당분간 지나 조선인의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각각 사냥감을 가지고 있다. 저것은 일순간 오싹 한다. 그들 여러분 심한 북쪽을 무사하게 피해 올 수 있어 고생했겠지요. 이제 괜찮아. 좀 더 먼저 미군의 수용소가 있어 안내합니다. 식사도 있습니다. 정말로 북쪽의 놈등은 이런 심한 모양으로 해!」라고 친절의 말로 가득하지만 충분히 질리고 있으므로 이미 알고 있다. 조심조심 마지막 공물을 내게 되었다.

지시대로 행렬은 계속 된다. 석양이 떨어져 암야가 된다. 몇 시간 걸었는지. 오늘 아침부터 위에는 전혀 잔류물이 없고 흔들흔들 진행된다. 때때로 트럭을 탄 조선인이 「좀 더」라는 연락을 위해 달려간다. 진행되어도 진행되어도 목적지는 안보인다. 그러나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소리를 내는 기력도 시들고 있다. 한밤중 아마 시계의 바늘이 다음날이 되었을 무렵이라고 생각하지만 전방으로 큰 떼의 희미한 빛이 보여 왔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점점 가까워진다. 왔던 것이다. 입구에는 개성(開城)수용소라고 써 있다. 대텐트가 무수히 있다. 각각 텐트의 할당을 받는다. 아나운스 「식사는 아침 7시무렵이기 때문에 용기(容器)를 가져 배급소에 집합해 주세요」. 그리고 몽롱해진 아침이 왔다. 식사가 제일이지만 용기(容器)? 그런 물건 있을 리가 없다! 누군가가 「캔이 한 잔 있어」 가 본다. 있었다. 미군이 사용해 내던진 캔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보물. 가능한 한 큰 캔을 주워 온다. 이만큼 있으면 부모님 형제도 만족할 것이다. 식사를 받으러 간다. 그 모습은 확실히 옛날 사용한 철제의 목욕탕. 물을 채우고 거기에 옥수수일표와 큰 우캔을 던져 포함 비등시켜 큰 주걱으로 가져 간 캔에 넣는다. 가지고 돌아간다. 즉석의 스푼으로 각각 먹지만 한 명 스푼으로 2회 입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료이다. 매점은 돈만 내면 뭐든지 구입할 수 있지만 보고 있을 수 밖에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근소에서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안전. 귀국도 할 수 있다. 북한과 비교하면 운니지차야. 그런데 운명은 조금 미소지어 가 왔다. 젊은이의 사역 모집. 곧바로 채용. 육체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무려 식사계. 큰 솥으로 물을 반입해 예의 물건들을 던져 포함 완성할 때까지 불기운의 상태를 본다. 그리고 완성되면 각 텐트에 분배. 일은 편하고 스프도 충분히 남는다. 덕분으로 친형제도 만복감을 오랫만에 맛본 것 같다. 그 식사 사정도 서서히 완화되어 오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전원 집합이라고 하는 아나운스가 있다. 우선 집합한다. 무슨 일인가. 일본인회의 임원이 차례차례로 단상에 서「여러분. 우리는 어떻게든 해 탈출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땅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동포가 있다. 우리중에서 필사적으로 북쪽에 잠입하거나 또 미군 상부에도 많은 탄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 주세요. 패전의 결과 일본은 삼등국 아니 사등국에 전락했다. 귀국후는 일본을 재건하고 적어도 필리핀 같은 수준의 나라가 되고 싶다!」 단상도 눈물. 듣는 분도 눈물. 이런 일 있어 좋은 것인가. 현재도 그 때의 비통의 절규가 귀에 남아 있다. 젠장! 젠장! 이번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밥솥계도 익숙해진 어느 아침. 미군 두명의 회화가 귀에 들려온다. 「어젯밤은 과음했다! 하하」 「오늘 밤은 조금 사양할까. 하하!」 이 회화가 귀에 들려오고 역시 전승국이다 라고 우리는 마음이 괴로왔지만 적개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반월후. 기다리고 기다린 승선을 위한 화차를 탄다. 목적지는 한국 전쟁으로 막카서가 역상륙 해 전황을 역전해 유명하게 된 그 인천항(仁川港)이다. 도중 연락을 위해인가 화차는 정차한다. 목전의 도로를 보면 다수의 미군 병사가 왕래하고 있다. 동실의 아이들이 화차의 밖에 나온다. 멈춰 선 미국 병사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초콜릿등을 아이들에게 분배한다. 아이들이 또 요구한다. 그 때 차내로부터 일갈이 날았다. 「너희! 아무리 패전이 되었다고 마음까지 썩었는가!」. 이 일갈에 경악 해 아이들은 차내로 돌아온다. 이것은 중대한 실무 교육. 이런 교육이 일본 재건의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시간이나 지나지 않고 흑인 병사가 양손에 대량의 물건을 가져 와「체프체프 오케!(여자와 좋은가?)」 노워노우노우(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병사가 유감스럽게 해산한다. 누군가가「역시 다르다! 그 나라와는!("마담다 와이"의 나라)」

목적지의 인천항(仁川港)에 도착. 여기의 항구는 간조와 만조의 차이가 약9미터 때문에 인양선은 아득히 난바다에 있다. 이 인천(仁川)의 지명은 일본어로 진센. 여기는 조선 병합 이전부터 일본과 가장자리가 깊은 장소에서 일본과 관계하는 무수한 역사가 있어 다수의 일본인도 거주하고 있었다. 월미도(月尾島)도 유명하고 여기도 병합 전부터 일본과 가장자리가 있어 거기에는 신사도 설립해 유원지도 있었다.

다음 이른 아침. 미군 사용의 상륙용 작은 배를 타고 꿈에까지 본 인양선 타카사고환(高砂丸)에 겨우 도착한다. 일본선이다. 그 증거로 선미에는 일장기가 당당히 내걸어 있다. 8000톤의 원병원선. 타카사고환(高砂丸)은 현측은 올려보는 정도에 높다. 상갑판에 승선할 수 있도록 그물이 쳐지고 있다. 어른이나 아이도 예의 노인 사카키바라(榊原)할머니도 생의 집착은 무섭다. 평상시라면 도저히 할 수 있는 곡예가 아닌 사람들도 넷을 잡아 잇달아 상갑판 겨냥해 뛰어 오르듯이 해 긴다. 상갑판에 올랐다. 상갑판은 일단 정비한 형적이 있지만 전투의 자취는 상당한 것. 물론 페인트도 벗겨져 있다. 그런데도 잘 살아 남았다. 그렇게 해서 하부의 큰 방에 안내된다. 얼마나 여기에 오지 못하고 무념의 죽음을 이향의 땅에서 노출해지고 있는 사람들 있는 것인가! 선원이나 간호사 전원이 일본인인 것이 기쁘고 다치고 있어도 타카사고환(高砂丸)자체가 일본의 냄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선은 패전 전후를 불문하고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친절했던 친구였다 지인이었다 혹은 미움의 눈으로 있던 全씨 劉씨 車씨 邉씨 曹씨등의 얼굴 또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아아. 나는 역시 조선 태생. 다양하게 심한 눈에 있었지만 역시 애착이 있었던 것이다. 망각할 수 없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될지 모른다. 나의 실감이다.

궁핍한 식사. 수수가 싱거운 죽. 그것도 근소. 유아들은 그런데도 열중해서 먹는다. 그리고 다 먹어도 가지고 있던 완(椀)을 손으로부터 놓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몫까지 넣는 모친이 많았다. 충분히 먹지 않은 모친들은 흔들흔들. 한층 더 빈번한 화장실. 화장실등과 품위있게 말하지만 임시에 긴급하게 만들어진 변소. 게다가 아득히 상부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거기까지 가까스로 도착하는 것이 필사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흔들흔들에서도 귀국의 빛이 있다. 기쁨이 있다. 「아가. 좀 더야. 너의 나라 일본에 도착한다!」

선내는 기쁨에 싸여 매일 밤 연예회이다. 본직의 연예인도 많이 있고 그 재주도 훌륭한 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제주도(済州島)부근을 통과한다. 몇 년전이었는지 동일 항로를 통과한 추억이 있었지만 그 때는 평화롭고 대련(大連)항로의 여객선이 항적도 희게 항행하고 있던 것이 생각해 낸다. 귀한자들은 지금 이렇게 해 친하게 지내고 있어도 귀국후는 일본 각지에 해산해 재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재회하면 그것은 정말로 우연일 것이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라고!

4일째 염원의 상륙지인 사세보항(佐世保港)입구의 해안선이 보여 왔다. 나는 일본인이면서 일본 본토를 처음으로 보았다. 초록 풍부한 나라. 이 표현에 실수는 없다. 정말로 초록이 풍부하고 전국 어디에 가도 동일하다. 대륙 독특한 그 독산 전산(全山). 저기에 이 초록이 있다면 알려 주었으면 하는 정도다. 곁에서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상담하고 있다. 은밀하게 들으면 패전 직후 비밀이 새므로 한 명 죽인 것 같다. 죽이지 않으면 살해당한다. 이런 일 그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곳 저곳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싫다싫다.

「오메이메시굿타가(너 밥 먹었어)」처음으로 듣는 토호쿠변. 놀랐다. 승선자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한 말이었다. 그 사람은 아마 야마가타현(山形県) 출신. 조선에서 살았던 시기가 짧아서 방언이 고쳐지지 않아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놀랐다. 경어도 대변도 없다. 나는 처음으로 일본인의 언어의 본질에 접했던 것이다! 식민지 태생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갑판으로부터 사세보항(佐世保港)을 바라본다. 예의 사카키바라(榊原)할머니 말버릇같이「나는 돌아가는 장소가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긴 세월 조선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적(籍)은 있고 본적에 돌아가도 얼굴도 모르는 지인도 없다. 이른바 연(縁)이 끊어져 있는 것이다! 지인은 무형의 재산이다. 전쟁 그리고 패전에서 여기에도 다대한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선자 중에는 17세 정도의 여자를 가리켜「이 아이는 내가 원망하고 있는 인간의 아이다!」라고. 그러나 나쁜 이야기만도 아니다. 조선에 있었을 때 신분의 격차로 다른 한쪽의 부모님으로부터 결혼이 반대되고 있던 것 같지만 원래 본인들은 사이가 좋았던 커플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패전에서 그러한 격차는 사라지고 당사자들 지금은 부부가 되어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는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 사카키바라(榊原)할머니 몇시라도 몸에 매달고 있던 수통에 젓가락을 넣어 빙글빙글 돌린다. 나온 것은 지폐였다. 보신의 분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부터 20년후. 카나가와(神奈川)의 모처에 간 때 우연히 인양이야기가 되었다. 그 사카키바라(榊原)씨의 이야기를 내면. 「그 이름의 술집이 있고 확실히 북조선으로부터의 귀한자와 들었지만. 거기로부터 그 유명한 가수도 나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짊어진 여자 아이의 어느 쪽인지 부모다. 연령도 맞는 것 같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그 혼란안 친하게 지내고 있던 사람들도 다수 있었지만 그때 부터의 행선지등 완전히 불명. 대개 돌아가는 장소가 있는 것이 드물다. 비록 돌아가는 장소가 있었다고 해도 전쟁 피해를 받은 장소일지도 모를 것이고. 희망으로서는 침착하는 앞이 큰 집에서 일시적이라도 동거를 할 수 있는 집. 그러나 그런 일을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일찌기 조선에 건넌 많은 사람들. 고향에서 유복하면 좋아하고 조선까지 갈 리가 없다. 안에는 한밑천을 기도한 사람들도 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대개 그처럼 단정짓는 것이 의외로 정론일지도 모른다.

상륙한 순간 큰 사기(社旗)를 나부끼게 하고 메가폰으로 「종방(鐘紡) 출신자는 없습니까」라고 외친다. 곁에 있던 사람의 좋은 일가5인의 타베(田部)씨가 거기에 달려 온다. 「당신 종방(鐘紡)출신자군요?」 그리고 타베(田部)씨에게 「당신에게는 당사의 집도 일도 있으니까 안심해 주세요」 처음은 놀라 무언이었던 그이지만 흐르는 눈물도 닦지 않고「감사합니다」 그 일가는 수렁으로부터 끌어 올려졌던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할 수 없는 행운이 뛰어들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운자는 그의 일가 뿐이었다. 그러나 타베(田部)씨와는 다르고 우리는 지금부터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제일에 생명의 보증 2번째로 지금부터 축적할 수 있을 재산도 보증되고 있을 것이다. 희망도 나온다.

2~3일본경제는 드디어 해산. 목표로 하고 행선지가 있는 사람들은 조속히출발.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든다. 행선지가 없는 사람들은 할당해 받은 귀한자 전용의 숙소에 나간다. 향후 그들들과는 재개하는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일가도 목표로 하고 있는 외가의 카고시마(鹿児島)에 향하여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