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방에서 다다미 6매분. 좁은 방에서 4.5매분. 하나의 방에 일가족이4~5사람씩. 후스마(방과 방을 나누는 개폐식의 문)를 경계로 하고 취침은 물론 식사 등 모두이다. 이러한 느낌으로 6가족이 같은 지붕아래. 반은 만주로부터의 난민. 고가의 물건이 있을 리도 없다. 거주자라도 물건을 팔고 식량을 산다 혹은 거기에 가까운 생활. 단지 우리 집에서는 근처의 조선인이 「무엇인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 줘. 또 물건도 우리의 집에서 숨겨 줄테니 안심해 주세요」라는 제의가 있었다. 정말로 고맙다! 큰 길에는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군도를 20세에도 못 미친 청소년에 해당하는 조선인들이 불모양인 모습으로 허리에 매달아 배회하고 있었다.
먼 친척에 해당되는 남자는 어디? 어느 날 조선어의 신문에 대활자로 구일본 경찰내에서 살인 사건 발생 그 살해자를 조사중이라고 발표하고 있었다. 혹시?라고 하는 의문이 생겼으므로 그 상세를 알고 있을까 이라고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런 일 모른다!」 그 사건의 자세한 것은 일본 상륙 후에 판명되었다. 살해된 인물은 물론 조선인. 원래 친러시아파로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밀고하고 있던 것 같다. 그 후 왠지 일본파로 바뀌었다. 언어는 일본 소련 그리고 조선어의 3개국어가 자유자재. 일본 경찰은 일본파가 된 그에 대해서 미인의 아내를 주어 훌륭한 주택을 주어 급여도 상당 고액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본 패전의 결과 그것이 해악이 되어 버렸다. 내부가 폭로되면 전원 범죄자. 이것은 절대로 은폐 하지 않으면 이라고 긴급명령을 받은 것은 단지 한 명의 경부. 다른 경관은 전혀 모른다. 어느 날 일실에 약10명을 집합시켰다. 이 조선인도 그 중의 한 명. 간단한 잡담을 하고 있는 한중간 그 경부 가라사대 「향후 어떤 사태가 생기는지 모른다. 그래서 몸을 지키기 위해 전원에게 피스톨을 주지만 그 전으로 취급하는 방법을 설명한다」라고 해 허리로부터 피스톨을 뽑는다. 「이렇게 해 사용한다」라고 그것을 공중에 돌리면서 돌연 동석의 조선인에BANG! 계속해2~3발. 완전하게 죽였다. 선혈 투성이로 숨 끊어진 그를 앞에 두고「전부내가 책임을 진다. 빨리 처리해 일각이라도 빨리 도망해 줘. 나도 가기 때문에」라고 말하면서「그러나 불쌍한 일을 했다」라고 해 떠난 것 같다. 그의 소식은 그 후 완전히 불명. 건재하면 아마 현재 90세를 넘고 있을 것이다. 이겨도 져도 피해를 당하는 것은 일반 서민. 그 희생이 무섭다.
이 일 문장을 쓴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지만 나에게는 미지의 장소. 그리고 만주도 포함하고 이러한 비참한 사례가 무수히 발생하고 있었을 것이다. 친구의 전(全)군은 변함 없이 내방하지만 최근에는 황혼시에 소곤소곤 몸을 숨기면서 온다. 화제의 내용은 근일에 발생한 이야기. 거기에 최근 재개한 학교의 화제. 특히 어중간했던 영어 수업의 이야기. 본다. 교과서가 전부 일본어다. 인쇄할 여유가 없겠지. 신정권은 젊은이의 학력 저하를 무서워해 해악이 없는 책만은 잠정 처치로 이러한 교육 시책을 취했을 것이다. 일찌기 일본에서도 패전 직후에는 군국주의의 장면은 먹으로 검게 전부 칠한 경과가 있었지만 그것과 닮은 것 같은 것이다.
저것은 10월 중순. 드디어 소련군의 본체가 입장한다라는 통지가 왔다. 그리고 그것은 당일의 야밤중부터 개시되었다. "고오고오"라고 캐터필러의 굉음. 자동차의 큰 떼 또 큰 떼. 인파 중에서 전(全)군과 2명이서 이른 아침부터 구경했다. 전(全)군과는 일본어로 회화하고 있었다. 그것을 배후에서 듣고 있던 조선인의 남자가 우리의 전면에 서서 「너희들은 일본인이냐?」네 「우리들은 이겼던 것이다. 무엇인가 불평 있을까? 이 침입자. 너희들 덕분에 많이 심한 눈에 있었다」 당연히 몇발이나 뺨치기의 제재를 받는 것을 각오했지만 「너는 아직 젊다. 지금은 이만큼으로 해 허락해 준다!」 재난을 위험하게 피했다. 어쨌든 무수한 인파. 장소를 변경한다.
우선 거대 전차에 압도 된다. 스탈린전차. 당시의 일본 전차는 불과 10톤 미만. 그것도 정말로 적은 수량이다. 거기에 비교해 소련의 이 전차는100톤. 무수한 대공포화가 상부에 설치되어 있어 어쨌든 거대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상부 해치(출입구)에는 사다리로 출입한다. 일본의 입장식때는 정연하게 해 규율 올바른 입장이었지만 소련의 입장은 양상이 전혀 상위하다. 사과를 갉아 먹는 병사. 전차의 옆에 자면서 애프터 마크(자동소총)로 실탄을 상공으로 향해서 연속 발포. 다수의 여성 병사도 스커트를 나부끼게 한 같은 행동. 정규의 군복은 몇 사람이 착용하고 있었을 것인가. 군모는 소련이지만 그 이외는 전부 일본군의 군복. 안에는 모자까지 전부가 일본의 군복의 소련 병사도 있었다. 거기에 짚신의 구두를 신고 있는 병사도. 내용의 인간이 진짜라면 그래서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녀병 옥수수를 생으로 갉아 먹는다. 심까지 전부 다 먹는다. 이러한 녀병은 독소(독일 소련)전때 유럽의 헝가리에서 격전을 섞은 정예 병사였던 것 같다. 거기에 지프의 큰 떼. 이것은 미국으로부터의 급여의 일부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것으로는 일본이 지는 것도 당연하다. 드뭄과 패배감이 혼합했다. 전(全)군 외치는「김일성(金日成)이 온다!」 소련군에 끼워져 소원수로 푸른 군복의 군인이 지프에 승차한 입장이다. 이 사람들에 대해 조선인의 사이에서는 독소(독일 소련) 전때 그 격전지 스털링 라드(현재의 지명과는 상위) 크루스크 스모렌스크등의 전장에 있고 독일군을 상대에게 재삼 소련군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金日成)의 부대는 일본군의 군장과 별로 다르지 않는 색 군복으로 게다가 얼굴도 동일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일본군과 오해한 것 같다. 그 때문에 독일군은 각처에서 작전이 능숙하게 가지 않고 마지막에는 소련군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진위는 별도로 몇번이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중앙의 김일성(金日成)을 확실히 보았지만 순간적으로 종속의 집단이 느낌이 들었다. 패자와 승자에서는 같은 풍경을 봐도 그 인상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과거의 감정이 있으므로 간단하게 지우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 내면 약6개월전. 조선인의 이(李)군은 「지금의 전황은 어떻게든 안 되는 것인가」라고 화낸 것 같은 얼굴로 말해 왔던 적이 있다. 그리고「미시마(三島)군. 나도 훌륭한 일본인이야!」라고 했지만 그것이 패전해 표변했다. 사상이 변화했던 것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물과 기름이다. 아무리 내선일체(内鮮一体)라고 말해도 혼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때 나는 뭐라고 회답했는지 기억은 망각했지만, 아마"너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우리와 동일한 일본인이었는데!"이렇게 말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눈앞대로. 세계가 역전했다. 악이 선이 되었던 것이다.
소련군이 입장한 그 밤부터 무서워하고 있던 약탈이 시작되었다. 아마 일본군도 점령 각지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헛됨과 알면서 주택 입구는 철선등에서 주위를 둘러싸 방어했다. 밤이 되면 비명이나 발포 등은 보통 상태가 되었다. 그때 부터 일주일간 후인 어느 날. 「스코브르니엣트?스코브르니엣트?」라고 젊은 소련 병사가 구두를 신은 채로 자택에 침입해 왔다. 무기 등은 휴대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가 삽(scoop)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과장된 표정으로 「다르다」라고 하고 손을 흔들지만 그의 희망의 물건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것이 최초의 소련병과의 개인적인 접촉이었다.
자택으로부터 300미터정도였구나. 거기에 있던 전일본인의 주택에 소련병 여러명이 주재했다. 나중에 판명된 것은 예의 "삽"남. 그는 19세. 이름은 폴. 일등병으로 무엇을 범했는지 모르지만 형무소로부터 직접 군대에 입대 당한 것 같다. 그 문제였다 예의 "삽"은 무슨 것은 없는 스푼(spoon)을 찾으러 왔던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등병.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소련군입장으로부터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억압은 한층 격렬해졌다. 어느 아침「미시마(三島)있을까!」4~5인의 몹시 힘이 센 조선인이 들어 왔다. 「네. 나입니다」라고 아버지의 대답. 「조금 용무가 있으니까 함께 와라」 동행이다. 떠난 후 모친이 한탄한다. 「이것은 시베리아다」그것을 증거로 10년이나 이전에 경찰을 퇴직해 우리 집의 맞은 편에 살고 있던 60세의 전 경관은 시베리아 연행이 된 것 같다. 그러면 없는가? 모두 무언이 된다. 의심 암귀로 보낸다. 그리고 황혼시. 궁핍하고 궁상스러운 저녁 식사를 가족과 무언으로 먹고 있으면 「다녀 왔습니다」이라고 평소의 아버지의 소리가 났다. 뛰쳐나온다. 아무 일도 없었던 모습. 좋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라고 어머니가 묻는다. 「 실은 그때 부터 원조선연탄주식(元朝鮮煉炭株式)의 광장에 연행되었지만 우체국 서무과장의 스즈키(鈴木)씨도 함께였다」 거기서 조선인들은 「스즈키(鈴木)! 너는 휴지의 국채를 판매했다. 그 때문에 구입한 일본인은 자업자득이지만 조선인에 속여 팔았다. 어떻게 하지. 책임을 잡혀! 미시마(三島)! 너는 조금이지만 여기의 노무 부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조례로 저기에 있는 신사에 전원 참배시켰다. 그 안에는 확실히 신이 있을 것이다. 너! 그것을 내 보여라! 무엇이다 너! 대답이 없다! 언제나 거짓말을 말했는가! 한 명은 휴지로 거짓말을 말했다. 미시마(三島)도 같은 죄로 신이 있다고 칭하고 거짓말만 말했다. 엉덩이를 내라!」 엉덩이를 내면 버트로 몇회나 구타되었지만 아무래도 진심의 구타는 아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 것 같다. 「너희들! 아무리 말해도 여기에서는 개심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에 돌아가 반성해라! 돌아가라!」라고 어이없음 없게 개방된 것 같다. 「그러나 구타의 상처는 전혀 없어」라고 하는 아버지. 무사하고 좋았다 라고 회화하고 있으면 「미시마(三島)씨 있을까」 아침의 소리와 동일한 소리다. 이번도 또 라고 전원에게 전율이 흐른다. 그러나 아침과는 분위기가 전혀 상위하고 게다가 우호의 조짐이 보인다. 3명 모두 술의 소병을 매달아 「오늘은 미안했다! 입장상 저것 밖에 없었다. 너는 선인이야」 그리고 1시간 정도 서로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마지막에 「무엇인가 곤란하면 알려 줘」라고 명함을 내민다. 거기에는 선교서(船橋署)교무 부장이라고 써 있었다. 그것이 인연?되어 잘도 나쁘지도 기묘한 교제가 시작되었다.
기묘한 교제. 이번은 털의 색이 다른 그 부근에 거주한 로스케(소련인)장교 폴이 소개했다. 무엇인가 의미 불명의 소련어로 말한다. 아마 자기 소개였지만 이름만은 느낌으로 판명된 "코리야". 또 한사람은 카피탄(경칭으로 위의 의미도 있다)육군 소위. 홍안. 연령은 28세. 전형적인 슬라브민족의 얼굴이다. 한가한가 매일 저녁 온다. 아마 그들의 덕분일 것이다 이 부근에서는 약탈 등 이상한 사건은 제로. 형편이 좋은 경호원 겸 부적 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서투른 말씨의 회화에서도 상당히 즐길 수 있다. 피도 눈물도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 전쟁의 비참함을 눈물을 흘리며 설명한다. 「니메트키(독일 : 당시는 악마의 대명사)는 강했다. 나의 부대는 100명의 부대였지만」이라고 하고 사진을 보인다. 그렇게 해서「이것도 전사 이 전우도 포코(탄환이 맞는다). 생존은 4명만」 진짜 최전선의 병사였던 것이다. 독일과의 싸움은 어떤 전장이었는가? 「하늘에서 저공에서 맹렬한 음향을 내면서 폭탄을 비와 같이 투하한다. 우리는 전차의 그늘에 딱 몸을 붙인다. 하나에서도 맞으면 워멜(전사). 이 뺨의 상처는 그 때의 상처다. 위험했다」 그리고 짖듯이 운다. 진실의 소리! 그것이 다른 집에서는 때때로 표변하는 것 같다. 다른 일본인 가옥을 덮친다. 부탁도 하지 않는데 자백한다! 「치비야 야브트이맛치 호이니야!」라고 아버지. 이 바보자식 축생은 일본류이지만 러시아식에서 거기에 가까운 표현에서는 「이 놈 이 불알 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가깝다. 그는 그것을 들어 쓸쓸히. 패자의 일본인으로부터 승자의 훌륭한 소대장에 대한 발언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 변명풍「니에 니에(부정)」의 연속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48세. 그는 28세. 그가 보면 맏형 혹은 의부로 비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서로 인의 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얼마 안되는 기간에. 감기에 걸리면 많은 약과 큰 러시아 빵 지참으로 문병하러 온다. 다른 집에서는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라)」를 상당히 했을 텐데! 영광의 대조국전쟁훈장이 소리를 질러 울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정의의 전쟁일 것이니까! 그 훈장이지만 전원 매달고 있다. 적어도 10개는 있었다. 무엇보다 살아 남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코리야. 카피탄이 착용하고 있던 훈장
소련은 일단은 법치국가이므로 북한에 침공하기 직전에 점령 방침의 지령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것은 스탈린의 지령이다.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과 조직의 연합에 의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3.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결성을 지원.
4. 현지 주민에게 소련화를 시키지 않는다. 사유 또는 공적 재산이 소련군의 보호하에 놓여진다.
5. 기업활동의 보증과 질서의 유지.
6. 군은 규율을 지켜 주민의 감정을 해치지 않는다.
7. 민간 행정은 연해주군관할구역 군사 평의회가 수행한다.
이상이 소련군의 포고문이며 훌륭한 것이지만 과연 실정은? 제일로「마담 다와이」. 이것은 주로 일본인 에 대해서만 한정한 것은 아니다! 조선인에 대해서도 있었다. 어느 평양의 번화가에서 조선인의 결혼식. 친족 일동으로 차?마차일지도 모르는 기다리고 있던 도중 악운에도 소련병의 지프가 그 눈앞에 딱 정지. 안으로부터 병사들이 튀어 나와「마담 다와이」 신부를 전원이 차안에 메어 어안이 벙벙하고 있는 친족 달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다스비다니야(안녕히 가세요)!」 이런 사건은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리야"와 "카피탄" 덕분에 부근 주재의 소련 병사들과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웃의 조선인「곤란한 일이 있으면 도와 주기 때문에」라고 말해 재삼 호의의 이야기였지만 최근 그것이 미묘하게 변화해 온 것 같다. 거기의 마누라「당신의 집에 빈번히 로스케가 오지만 무엇인가 있는 것인가」 사정을 설명한다. 그녀는 놀란 것 같은 행동을 하면서「나의 집에 오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 일을 로스케에 이야기해 주세요」 패전전 애창 된 린조(隣組)의 가사에"도울 수 있거나 돕거나"의 가사가 있었지만 이번 건은 광의의 의미로 3개국의 인간이 관련되고 있다. "도울 수 있거나 돕거나"의 본질이 되었던 것이다!
"그렛서" 23세. 사관학교 졸업의 진짜 엘리트로 미지의 나라 일본의 문학에 대해서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 "페이치야"38세. 응소병으로 원은행원답고 원만하고 신사적인 병사. 마지막에 그의 아내를 보여졌다. 금발 미인으로 일견 사랑이 있는 느낌이다. 아직도 지인이 된 병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패전국민과 승자로 게다가 상대는 그 병사다. 입장이 큰 차이 한다. 이것이 평화시라면 훌륭한 사람들과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요즘이 되면 희미하게 잔영이 남아 있던 일본색 현상도 완전하게 불식 되어 외형에도 북한 임시 인민 정부가 형태 만들어져 왔다. 어느 날의 오후 무서워하면서 교제를 하고 있던 인민 치안원이 3명이서 방문. 그늘에서 아버지와 무엇인가 회화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아버지는「조금 그 사람들에게도 협력하지 않으면. 4~5일 부재중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자택을 나왔다. 나올 때 치안원의 사람들은「걱정하지 말아 주세요. 무리한 구속은 아니니까. 단지 협력받을 만큼이기 때문에」라고. 그렇게 말해졌지만 역시 불안을 모두 불식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라고 하는 것도 약4년전. 평양의 무선국장의 현직이며 게다가 그 국은 평양 비행장의 부지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 일반 무선 업무 뿐일 것인데 전황이 치열하게 되는 것에 따라 군으로부터 의뢰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군비행기 탑승원에 대해서 무선의 교수였다. 다만 군내부를 자유롭게 활보 하므로 신분은 소좌 취급이었다. 그리고 훈련과 그 실천은 조선 북부의 대게릴라 작전 무선 교신의 지도. 그것까지 병사의 통신기술은 정말로 미숙하고「그것으로는 통신을 받는 분에서도 곤란하다」라고 아버지는 이따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투력은 있던 것 같지만 통신 능력이 미숙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일반 국민은 그런 내정은 몰랐던 것이다. 그 후 전근으로 지금도 현존 하는 한국 서울 부근에 있는 김포(金浦)비행장 근무가 되었다. 이 비행장은 옛날 일본군이 건설한 것으로 아버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당시라도 내부는 지하3층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도 탑승원 훈련 때문에 이번은 거기에서 후쿠오카(福岡)의 간노스(雁ノ巣)비행장까지 현해탄(玄海灘)을 넘는 훈련이 몇회인가 있던 것 같다. 그 때의 군용기는 한때 유명했던 육군 중폭격기 돈류우(呑龍)였다. 3기 편성으로 상시 1번기에 탑승하고 있었지만 몇회째 어떠한 사정으로 2번기에 탑승. 그런데 인간은 운이나 불운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모른다. 그 때 1번기는 엔진 부진으로 현해탄(玄海灘)에 바다에 추락. 표면에서는 일단 명예의 전사 발표였던 것 같지만! 그 때 2번기를 타고 있었으므로 생존할 수 있던 아버지는 이 후퇴직. 이 사건도 퇴직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냉혹한 현실을 봐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퇴직의 원인은 그 밖에도 있고 평양으로부터 경성(京城)에 단신부임 했을 때. 단신부임중도 주1회는 평양에 귀가하고 있었지만 식량 배급조차 비참한 시대. 그런 생활 언제까지나 계속 불가능. 군으로부터의 특별한 배려에서도 있으면 이야기는 별도이지만 그것도 없다. 그러한 현상으로 퇴직한 것 같다. 퇴직후는 무선과는 관계가 없는 회사에 취직한 일도 결과적으로 이것 또 대난을 피한 요소의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추락 사건은 1944년3월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운이 나쁘면 그 1번기에 탑승해 추락사. 훈장의 하나 정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패전의 후에는 그런 훈장도 어떤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아버지가 치안원과 집을 나온 것은 부근의 사람들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들도 혼란 시기이므로 깊은 관련까지 알 리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 매일이었다. 하나의 희망은 그들의 악감정이 제로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괴로운 나날의 마지막 날. 약속대로 아버지는 귀가했다. 아버지 가라사대「상당 협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이의 회의의 결과「실로 우리 나라에 대해서 잘 협력해 주었다」라고 감사가 표명된 것은 좋지만 마지막에 「어떨까 앞으로 4년 잔류해 주었으면 한다. 가옥 그리고 식량은 특별 대우로 귀국까지 준비할 수 있다!」라고. 아버지는 「그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족과 상담하므로」라고 해 귀가했던 것이다. 4년 참고 견디면 괜찮아. 일본에는 특별선으로 귀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도 반신반의. 가족도 맹렬하게 반대. 「우리는 일본인이랍니다. 당신 그것은 본심입니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분노소리. 아무리 패전이 되어도 일본에 돌아가 가난해도 같은 일본인끼리. 이것이 이틀밤 계속했다. 결국 본심은 모두 같다. 잔류하지 않아 좋았다. 그때 부터 한국 전쟁. 가족 전원이 생사 불명하게 되고 있어도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치안원에게 협력한 내용도 정말로 경악이었다. 아버지는 무선 탐지기로 당시 남조선으로부터 침입한 공작원의 체포에 협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것은. 저것은 지옥이었다. 체포가 된 사람들의 운명은...」그 아버지도 지금부터 30년전 세상을 떠났다.
때때로 린조(隣組)를 통해서 2일정도의 소련 군사역의 통지가 있었다. 린조(隣組)는 패전까지는 배급이나 군의 협력으로 절대적인 존재였지만 패전이 되어도 그 기능의 가치는 승자의 소련군에 있어서도 편리하고 이용가치의 충분히 있는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그것을 통한 통지로 가라사대「전 일본병과 경찰 관계자. 그리고 재판 관계자의 신고 의무. 이것은 10년 지나도 시효에는 안되어. 신고를 게을리하면 린조장도 동등으로 인정한다」 문면은 몹시 평온이었지만 이것은 그 시베리아 연행의 전단계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쪽에서도 여기에서도 출두. 그리고 어디와도 없게 연행된 것 같다. 거기에 이전에는 비정한 금융업도 이 멤버에게 편입되었다. 그러니까 보다 영리한 사람들은 그 감을 헤아려 재빠르게 도망한 것 같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린조(隣組)에는 이러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거기에 제일 해당한다고 생각되는 아버지도 전술한 조건을 채워 있었을 텐데 어떤 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쪽 치안 당국 이 비정한 통지는 패전 후2~3개월 후로 정말로 예측도 하지 않았다. 그 후루카와(古河)지사가 공동으로 발한 포고문은 휴지로 되었던 것이다. 다양한 협의의 결과 사역의2~3날이 어떠한 작업인가 불명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악감정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이라고 하는 것으로 아직 엄한으로 되어 있지 않은 계절. 가능한 한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사역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타는 소련군의 대형 지프. 그 속도의 신속한 일. 실제 패전 전후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차에 승차한 일은 없었다. 도착한 것은 곧 가까이의 전 일본군비행장. 작업은 거기의 뒷정리이다. 약100명 정도 있었을 것인가. 철쓰레기 판쓰레기를 목코(운반용의 바구니)로의 운반. 감독의 소련 군인은 어깨에 자동소총을 짓고 있지만 별로 공포는 없다. 그렇게 해서 늦은 소련 급여의 점심(소련의 점심은 오후2시). 공동 노동에 참가한 소련 군인과 함께 고기 넣은 스프와 흑빵의 식사. 정도는 좋았다. 그리고 좀 쉬고 있으면 제일 젊은 나의 그룹에 여러명 모임 나에게 묻는다. 「너는 전 학생인가?」 그렇다. 아득히 멀리 많이 쌓아 두는 전일본군의 폭탄을 가리켜「그토록 무기가 있었는데 왜 싸우지 않았던 것일까? 소련에서는 가족 전원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 계속해 말하는「만주의 전투로 일본군은 미츠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의 무기를 사용했지만 저쪽에서 포코 이쪽에서 포코. 이것으로는 진다. 너도 왜 싸우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 어깨를 두드린다. 아니 일본인은 일본왕의 명령으로 전투를 중지했던 것이다. 「뭐? 일본왕의 명령으로? 믿을 수 없다. 소련에서는 그 니코라이 황제를 넘어뜨려 정의의 군이니까 일반민도 맨 먼저에 참가했던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그 때의 분위기 그리고 몸짓 손짓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옷타코이 옷타코이(이런 식으로)」 이것은"싸운 그는 죽었다"라고 통곡을 섞어 설명이다. 그들의 눈에서 본 나는 혹시 장래 지금까지의 사상을 표변해 좋은 소련 공산 동맹의 일원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했다. 그 느낌을 증가하듯이 여러명어깨를 두드리거나 악수를 해 준다. 그리고 악감정이 제로에 동일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종이에 세계 지도를 그려「일본은 조선(朝鮮) 가라후토(樺太) 만주(満州) 대만(台湾)을 탈취해 그리고 중국(中国) 남보우까지 착수했으므로 우리 정의의 군이 그 야망을 분쇄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게 해 두면 뭐라고 하는 것이다. 머릿속 전부가 군국 소년의 나에게는 견딜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까! 당신의 동맹인 미국은 독립 당시 13주. 그것이 멕시코로부터 그 캘리포니아주를 잡아 하와이 왕국을 병탄해 지금은 48주. 당신의 나라 소련에서는 18세기까지는 모스크바 주변이었는데 19세기 피여틀 대제의 시대에 아시아의 극동까지 진출한 것은 아닌가! 나의 반론을 들어 그들은 분노 냈다. 그러나 휴식 시간 종료. 또 다음에 라고 각각의 연설도 애매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기 시작하면 잘도 저런 반격을 말한 일이다. 특별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안심한 순간이었.
11월이 되면 무서워하고 있던 겨울이 가까이 된다. 물건을 팔아 먹는 생활. 마을의 도처에 만주로부터의 난민 부인의 모습이 보여진다. 재래 일본인과 만주 난민의 구별로서 여성이 머리카락을 짜 그것을 머리 부분에 둥글게 감고 있다. 우리도 변변한 것을 먹지 않았는데 그녀들은 거의 어린이 동반으로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냉혹하게도 북한 인민위원회는 일본인에 대해 장사 금지의 포고를 내고 있다. 매물도 다 팔아 식량의 배급은 제로! 덕분에 우리와 동거하고 있는 만주 난민 세키모토(関本)씨일가를 포함하고 모두 말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다양한 곤궁자가 동거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경과하고 있으므로 그 대부분은 망각의 저 쪽에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는 비참한 일가 전멸을 상당수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무엇인가 형태로 적어도 이름만으로도 귀국후 알리자고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단지 세키모토씨(関本)의 경우만은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나는 18세. 나의 가족인 부모와 당시 15세였던 여동생의 3명은 지금은 이 세상에는 없다. 나보다 6세하의 남동생은 당시 12세. 아직도 아이였으므로 이 실정의 증언자는 나 혼자에만 되어 버렸다. 현재 70세 이하의 사람들은 실례인 말투일지도 모르지만 아까운 일이지만 당시는 아직 성인 부근의 연령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바 아이의 눈으로 본 패전의 현실 밖에 기억에 잔류하고 있지 않는 듯한 생각이 든다... 세키모토씨(関本)는 당시 32세. 니가타현(新潟県) 출신. 만주(満州)심양(奉天)으로부터의 피난자로 남편은 소집병으로서 직장에. 아이는 3명. 장녀는 야스코(靖子)였다고 기억6~7세. 차녀는 5세. 이름은 망각. 최후는 남자로 3세. 이름은 코우(鋼)이었다고 기억. 장녀는 언제나 창백한 얼굴을 하고「어머니 어머니 」라고 모친의 곁에 있었다. 7세의 소아에게는 이것이 필사적인 삶의 방법이었던 것일 것이다. 평화시라면 모두에게 축복을 접수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먹고 있었는가. 아아! 그런데도 그 시점까지는 소강이었던 것이다. 비록 궁상스러운 것만 먹고 있어도... "발진 치브스". 이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몸부림 한다. 당시 특효약 등 존재할 리가 없다. 빈곤한 패전국민에게는 그것이 만연해6~7세이하의 소아는 거의 전멸. 그 겨울에 평양(平壌)만으로 그 희생자는 4000명이라든지 그 2배라고도 말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거기에 더해 성인도 다수 그 희생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무서워하고 있던 병마가 최초로 장녀에게 감염. 3일 정도로 눈 깜짝할 순간에 사망. 울부짖는 세키모토(関本)씨. 전술한 것처럼 드문 것은 아니다. 아무도 방문하는 사람도 없다. 고생해 찾아낸 얼마 안되는 향(線香)으로 장녀를 공양한다. 장례식 같은 것 없다. 사망이 확정하면 다음날에는 일본인회의 사람이 시체를 짚으로 싼다. 눈길안 시체안치소에 직행한다. 그래서 전부 종료. 그런 것이 연일로 드문 것은 아닌 상태이며 비참이라든지 참혹이라든지 그러한 표현에서도 감정적으로는 그 일부 밖에 해당하지 않는다. 말한다면 표현의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직후 별실에서 다른 가족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난다. 유감스럽지만 이름은 망각. 일본의 어디 출신자였는가. 그 부인은 아마 소아가 2명 있던 모습이었지만 이야기에 들으면 마지막에는 방수(部屋数)의 관계로부터 일본인 주체의 수용소에 수용된 것 같다. 나도 무슨 용무였는지 생각해 낼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수용소에 재삼 간 기억이 있다. 거기는 원래 무엇인가의 창고의 자취로 벽돌 구조. 텅해 넓이 100평 정도로 천정이 높다. 거기에 각 집안족 마다 주위를 난폭한 연(筵)으로 둘러쌌을 뿐. 영하20도의 극한인데 난방의 "난"의 글자도 없다. 거기에 영양 실조가 가속하고 보통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병에서도 곧바로 만연한다. 그 때문에 일본인회에서는 이 궁상을 어떻게든 개선해 주었으면 라고 북한 인민위원회 그리고 소련 사령부에 끈기 강하게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평양에서는 이것과 동일한 비참한 장소가 몇군데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1회만은 간원의 효과가 나타나 소련군의 여의를 선두에 현장에 왔던 적이 있었다. 전원 머리 부분으로부터 지금은 악명에 되어 버린 옛날 그리운 DDT를 받는다. 양손에는 눈 깜짝할 순간에 조(蚤)나 슬(虱)의 시체의 큰 떼가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최대의 선물. 아이에게는 하루3합 어른에게는 하루5합. 백미(白米)의 급부이다. 거기에는 과연 소련답게 조건이 붙어 있다. 가라사대「이 미를 완전하게 사용하라! 만일에도 잉여미가 출현하면 즉시 이 급부를 취소한다!」라고. 우리는 모두 선망의 눈으로 그 상태를 보거나 듣거나 한 것이다. 우리도 백미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집으로부터 수용된 어느 일가는 불쌍하게 전멸 한 것 같다. 일본 본토의 고향에서는 이 슬픈 보고가 완전한 형태로 알 수 있었는지! 예의 장녀를 잃은 세키모토(関本)씨. 차녀 그리고 3세의 코우(鋼)군도 같은 운명. 아이 3명 전멸이다. 세키모토(関本)씨 울부짖을 뿐. 「 나는 남편에게 만나게 하는 얼굴이 없다. 실은 나는 후처였다. 친자식은 마지막 코우(鋼)뿐이었지만 나는 친자식과 동일하고 다른 아이도 길렀다. 정말로! 나의 마음에 틈새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되어 버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지면에 얼굴을 칠하면서 양손으로 지면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그 때는 젊었지만 현존 하면 90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지든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인지 지금도 불명하다. 아마 고생하고 귀국을 완수했다고 생각하지만 일생 심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비록 혼자라도 생존해 귀국할 수 있던 것이라면 불행중의 다행으로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부평(富平)으로1486명 함흥(咸興)에서2148명 진남포(鎮南浦)에서는1600명 웅기(雄基)202명 나진(羅津)119명 청진(清津)500명 성진(城津)281명 신의주(新義州)259명 용암포(龍岩浦)387명 정주(定州) 528명 38도 부근에서 200명 그리고 평양(平壌)에서는 6000명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상상하는데 실세는 이 숫자는 적어도 4할은 부족한 느낌이다. 이러한 희생자는 무모한 대륙 정책과 군국주의의 대실패에 의한 죄도 없는 일반 서민이다. 또 외국인도 흰색으로부터 흑에의 대변화였으므로 이러한 사람들중에도 다대한 희생자가 출현했을 것이다. 전부는 무리여도 적어도 일본인의 묘지 정도는 공의 주최로 그 영혼을 위로해 드리고 싶다.
친구의 전(全)군은 내방의 다리가 약간 멀어지지만 1주간에 1회 정도 숨어 만나러 온다. 그도 학교가 재개되고 있다고 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의 회화 밖에 없다. 또 온다 라고 곧바로 귀가한다.
드디어 생활에 곤궁해 왔다. 조선인 상대의 장사는 금지되고 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체력적으로 중노동이 별로 자신있지 않다. 그 때 "로스케"상대의 장사 그리고 경노동이라면 이라고 하는 것으로 조심조심 로스케의 관사 순회를 생각했다. 저기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 고생은 아니다. 거기는 옛 군용도로를 직선에 도착한 곳이다. 길의 도중 군용도로 양측으로 버려지고 있는 전 일본군항공기의 잔해가 상당수 그대로 줄지어 있는 것을 발견. 비행기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첫 경험이었지만 아무래도 선객이 있던 것 같다. 내가 침입한 것은 전투기 폭격기. 조속히 내부에 들어간다. 낙하산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강렬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최근까지 일본의 산업 전사가 나라를 위해 이길 때까지는 라고 열심히 작성된 작품이다. 분한 유감의 감정이 가슴 속에 온다. 조선 태생의 나이지만 패배해도 일본의 피가 흐르고 있고 허세도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 때로부터 진품에 흥미가 있어 다양한 물건을 즐기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종래의 물건들과는 전혀 상이한다. 그러나 그런데도 눈앞에 게다가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인간 본래의 본능도 나온다. 진한 녹색 이것은 낙하산의 이음쇠. 거기에 비행용의 손목시계 몇 개. 최후는 연료 탱크에 겹겹이 가려 있는 생고무를 벗겨낸다. 이러한 물건들은 현재는 전부 진품. 특히 낙하산은 전문 업자라도 꽤 입수가 곤란하다고 듣는다. 비행모자는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로스케행은 중지. 진품의 선물을 자랑기분에 귀가한 것은 좋지만 곧바로「무엇이다. 이런 것. 나는 기대하고 있었는데.」라고 어머니의 말에 실망. 무엇보다 가족은 식량을 기대했었던 것이니까 대답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12월에 들어가면 강설은 별로 없었지만 한기가 격렬해졌다. 좋아 오늘이야말로 라고 분발해 로스케 숙소에 도착. 거기에는 그 길의 선배가 여러명 배회. 나도 기억한지 얼마 안된 러시아어로 한채 한채 큰 소리로 「라보타니엣트(일 없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집에서 문이 열린다. 안으로부터 연령25세 정도의 "마담"이 나와 예스 예스라고 나를 불러 들인다. 가면 빠른 말의 러시아어로 가리킨다. 저 쪽을 보면 구일본기의 프로펠라의 산이다. 그녀 「타폴」이라고 외쳐 지참해 온 것은 신(薪)을 나눌 때에 사용하는 도끼이다. 일본식과 상이하는 것은 조각칼날이 날카롭다. 이것으로 프로펠라를 나누지만 이것에는 고생했다. 통행중의 소련 병사 어색한 나의 작업을 보고 도와 준다. 과연 요령이 좋다. 그리고 병사는 떠난다. 겨우 프로펠라 나누는 일도 익숙해져 왔지만 뭐니 뭐니해도 단단하다. 아마 떡갈나무의 나무였던 것 같다. 조금 공복이 되어 왔다. 벌써 정오이지만 도시락과 같은 호화품은 가져 올 수 없다. 자택에는 식량이 없는 것이다. 약간 잠시 후 문이 열린다. 멋진 향수의 냄새. 「스트시에 이지스다(당신 이쪽에 와라)」라고 했으므로 방에 들어간다. 그녀는 테이블을 가리켜 「다와이크우시에(빨리 먹으세요)」 놀랐다. 이런 훌륭한 식사 패전 이전의 몇년전으로부터 먹었던 적이 없다. 스프. 사발의 내용은 감자와 쇠고기가 대량으로 들어가 있다. 훌륭한 러시아 특유의 흑빵. 아니, 정말로 훌륭한 것 한마디에 다한다. 열중해서 먹고 있는 도중 부모의 얼굴 형제의 얼굴이 떠올라 나만이 라고 미안한 기분이 뿜어 나오지만 지금의 경우 어쩔 수 없다. 이런 훌륭한 식사를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 하라쇼 스파시보(대단히 고마워요) 러시아어는 기억했던 바로 직후로 자세하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단단했던 프로펠라도 어떻게든2~3일의 페치카(난로)용으로는 괜찮은 분량이다. 만약 이 가옥이 종래의 일본식이라면 실내의 난기가 새어 버리지만 러시아식에 개조되어 있으므로 대부분 어떤 걱정도 소용없다. 그들은 일본 가옥 접수와 동시에 먼저 현관의 미닫이를 도어로 한다. 그리고 도어의 양면과 그 접촉 부분을 많은 옷감으로 엄중하게 붙인다. 다음에 창(일본 시대라도 전이중창(全二重窓)). 창반에는 인각(籾殻)을 넣어 그 상부에는 옷감으로 완전 밀폐. 그 외 벽에 조금이라도 틈새가 있으면, 신경질에 일점 일점 꼼꼼하게 점검한다. 그러니까 혹한에서도 실내는 간단한 복장으로 보낼 수 있다. 이것은 한랭지에서의 생활의 지혜의 하나일 것이다. 프로펠라를 나누는 것은 상당한 노동이었지만 젊은 힘으로 이것을 했던 것이다. 마담 스스로 이름은 "레나"라고 말해 큰 러시아의 신문지에 무엇인가 감아 나에게「스토시에나」라고 내민다. 그렇게 해서 고마운 것에「내일이나 모레도 와라」라고 한다. 안의 물건은 무려 쇠고기인것 같다. 서투른 말씨이지만 감사를 말해 귀가했다.
다녀 왔습니다. 가족이 놀라는 얼굴. 큰 쇠고기. 거기에 러시아 빵이 2개. 현재의 빵을 한층 크게 한 것으로 감미는 없지만 식용에는 최적이고 일본의 빵같이 질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말하는「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 약3분의1의 분량을 드렸다. 같은 지붕아래에 있던 3가족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감사의 말. 동시에「아아! 이것으로 살 수 있다」라고 환희의 말이다. 우리 집에서도 언제 먹었는지 기억에 없는 맛있는 음식을 그야말로 열중하게 먹었다. 처음은 먹는 일에 필사적으로 회화가 없었지만 공복을 채우는 것에 따라 서서히 회화의 여유가 나왔다. 「너. 오늘은 정말로 수훈갑(殊勲甲 : 최고의 훈장)이다」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그리고「그러나 정말로 좋은 사람에 해당되었군」이라고 드물게 나를 칭찬했지만 지금 되돌아 보면 대동소이는 있다고 해도 한 때의 적국민인 우리에 대해서 특히 소련의 부인은 온정이 있던 것 같다. 그들도 우리 이상으로 곤란을 다했던 것이 당연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 승리자로서의 업신여긴 태도를 별로 볼 수 없었다. 소련인의 인상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것이 집단이 되면 표변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간단한 말로 응축하면"시골자의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본측의 타당한 감각이지만 그 거짓말쟁이에게도 상이가 있다. 일본인의 사이에서는"그 놈거짓말쟁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거짓말은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사례가 있다. 최근이라도 러시아 선원"당신의 집은 어딘가"물으면 선적이 블라디보스토크라면 전원이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대답한다. 그러나"당신은 어디서 삽니까"와 물으면 자신의 주소를 알려 준다. 국민성 습관의 상이다.
최고의 대접을 해 준 레나에 무엇인가 답례를 이라고 생각해 찾아낸 것은 근처에 버려지고 있는 히나인형. 이것을 줍고 이튿날 아침 3체를 그녀에게 선물 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큰 소리를 내 부근의 마담들에게 알린다. 그녀들이 소란스럽게 온다. 그녀들의 눈에 비친 것은 진품중의 진품이었던 것 같다. 그녀 무슨 일이나 전화를 한다. 그리고 주인이 군직무를 중단해 빠른 걸음에 귀가한다. 주인은 알기 쉬운 소련어로「인형을 게네랄(元師 : 원사)이 부디 사고 싶다고 한다」 원사(元師)! 이번은 내가 경악 했다. 나의 인형이 구름 위의 사람에게 직통했던 것이다. 귀가하고 이번 일은 나에게는 너무 큰 이라고 아버지에게 상담한다. 이번은 진짜 단골손님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가능한 한 훌륭한 히나인형을 찾기 위해 각처를 뛰어 돌아다닌다. 있었다. 그곳의 집에서는「인양으로 전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인형에게는 추억이 차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이므로 버리는 것보다는」이라고 조금 고가이지만 대금 300엔을 지불해 인형을 받았다. 확실히 훌륭한 인형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일품이었다. 이튿날 아침 보자기2매에 배분해 짊어져 보행. 그리고 조선의 보안소(경찰의 파출소)의 앞을 통행중 거기로부터 나온 소원「일본인 무엇을 가지고 있다! 보여라」 하이(네). 소내에서 보자기를 펼친다. 「뭐야 인형인가」 하이(네) 「빨리 가라」. 이 때까지는 좋았지만 그리고 30분 끝없이 설교. 「36년 우리 나라를 침략했다. 대개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모르는 것이다」하이(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머릿속은 인형 장사 밖에 없었다. 이 난을 피하는데"하이"밖에 말할 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방면 "아휴" 였다. 목표로 하는 레나택에 가면 기다림에 지친 같게 레나의 남편이 선도해서 진행된다. 접근하는 것도 할 수 없었던 총사령부이다. 그렇게 해서 안쪽에 안쪽으로 도착한 장소는 훌륭한 넓은 방. 이전의 일본 군간부의 집합한 꿈의 자취이다. 약간 잠시 후 기라성의 장군이 들어 왔다. 훌륭한 체격으로 언뜻 본 것만으로 훌륭한 군인이다. 레나의 남편은 평신저두로 긴장하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사람은 아마 대장격이었던 것 같다. 이것으로는 신분이 너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입실해 온 것이"게네랄" 같다. 나의 가슴 속은 이것은 장사할 경황은 아니게 유무를 말하게 하지 않고 투옥될지도 모르는 정말로 두근두근의 일순간이었다!. 테이블의 곁을 가리켜「자지에치(앉아라)」 그리고 바로 정면에 원사(元師)가 착석 . 「인형을 진열해라」라고 한다. 진열한다고 감탄의 소리가 높아진다. 다음은 설명. 그들은 훌륭한 것이라고 아는 것 같지만 내용을 모른다. 그 때의 나의 설명은 자신이 들어도 알기 쉬운 통역이었다고 지금도 자랑의 이야기다. 게네랄이 최상부의 인형을 가리켜 「이것은 무엇이다」왕과 왕비인형 다. 이것은 미카도(천황을 "미카도"라고 칭했다). 근처는 미카도 마담. 그들에게 있어 보면 상상한 적도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들었던 적이 없는 러시아 특유의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올린다. 그리고 아래는 이것은 "사무라이 게네랄"다. 눈앞의 진짜 게네랄(元師) 동의를 얻었다고 크게 수긍한다. 나머지는 간단했다. 그 아래는 마이요르(미장이) 그렇게 해서 다음은 카피탄(위관) 최후는 소르다트(군인) 그렇게 해서 러시아풍으로 새끼손가락을 야비를 담아 내뿜는다. 그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전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좋다! 장사는 성공이라고 예감 한다. 게네랄은 종이를 내밀어「얼마인가?」 위엄에 져서는 안 된다. 아무리 패전국민이라도 라고 가슴 속 외치면서 5000이엔(엔). 거래의 공방이다. 게네랄(元師)「2000이엔」니엣트(안된다)... 결국 300엔이 뭐라고 3800엔으로 낙착했다. 판매자는 물론 대승이었지만 게네랄(元師)도 기뻐하고 있는 모습. 그 증거로 모스크바 사마료우트(비행기)의 회화가 단편적으로 들린다. 최후는 게네랄(元師)과 악수. 그 때, 만약 회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잡고 일본인의 비참한 상황을 한마디에서도 좋기 때문에 호소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패전국민으로 게다가 미성년이 이런 구름 위의 사람과 잘 거래할 수 있던 것이다. 아마 일소(일본 소련)경제교섭타결의 진짜 선구는 아니었던 것일까. 일본 경제 재건의 초기는 형태 나라도 각각 있지만 이러한 최대한의 갈림길 외교였던 것이 틀림없고 현재에도 대동소이 저것 끝없이 하고 이러한 사실이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항은 이른바 로망과 모험으로 가득 찬 이야기이지만 일반 조건으로 점수를 매기면 만점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일은 아니었지만 소련 군인의 관사(官舎) 순회 덕분에 어떻게든 식량의 조달을 할 수 있었지만 때때로 일이 없는 날들이 계속 될 때가 있었다. 어디에 가도 일의 의뢰가 없다. 그러나 혹한의 계절로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그나마 구제였다. 어느 날의 오후 한 채의 집에서 무엇인가 큰 소리가 한다.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늘로부터 들여다 보면 애주가의 소련 군인7~8명으로 술꾼의 한중간이다. 아마 전승 축하를 겸한 연회일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중요한 테이블에 관심을 가지면 있을 수 없는 풍경이 전개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걸고 있던 물건은 뭐라고 일본 여성이 사용하는 그 적색의 허리띠. 그리고 손재주가 있게도?그 허리띠의 끈을 테이블의 다리에 붙들어매고 있다. 그리고 술을 넣고 있는 그 용기(容器). 현재는 형태도 상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리로 만들어 있는 뇨병(尿瓶)이다. 거기에 편리한 일로?눈금까지 완비하고 있다! 습관의 상이로 그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불(知らぬが仏)"과는 정말로 이러한 일이다. 그들은 즐기고 필시 즐거웠을 것이 틀림없다! 대동소이 아마 일본병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尿瓶과는 몸의 부자유스러운 사람이 침대에서 잔 채로 소변을 잡는 병)
습관의 상이는 아직도 있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애완동물로서 개와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지만 이미 그러한 생활의 여유는 없어져 오고 부득이 각각 최선의 방법을 이라고 생각해 소련 부인에게 신청하면 애묘는 간단하게 승낙해 주었다. 정말로 그 애묘는 행복해졌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 가옥에 남아 있던 불단을 중요한 빵의 보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문은 완전하고 간단하게 개폐할 수 있고 게다가 외부로부터 비쳐 보인다. 불단이 그들의 취미에 있었던 것이다! 그 불단의 곁에 당당히 눌러 앉는 것은 애묘였다. 고기나 물고기 등 호화 삼매에 먹을 수 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거기에 비교해 개POCHI의 운명은? 이것에는 곤란했다. 소련 부인은「니나다(필요 없다)」 그러나 부근의 조선인이「나에게 주세요」라고 하는 신청. 우리 집의 개는 소형이지만 적견(赤犬)이다. 식용에 최적인 개다. 눈물을 삼켜 내민다. 목에 줄을 감겨지고 단념했는지 목을 내리고 우리 가족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몇번이나 뒤돌아 보면서 떠나 갔다. 그때 부터 몇 십년 경과해도 불쌍한 일을 했다고 지금도 생각해 낸다. 패자와 승리자는 애완동물에까지 영향을 준다.
예의 "코리야" 어느새인가 없어졌다. 그토록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라고 이상하게 생각해 그의 동료에게 물으면 모두 일제히에 양손의 손가락을 격자로 만들어「이것이야」라고 러시아풍으로 알린다. 뭐! 이 격자는 감옥의 의미다. 호인같았지만 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다른 장소에서 난폭이나 약탈을 하고 그 결과가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보다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사람도 많이 있고 대중의 눈앞에서 7명 정도 공개 총살로 처형된 것 같다. 없어졌던 시기는 이제 봄의 기색이 나온 6월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는 추억이 많이 있다. 그가 없어진 1개월전 독일 항복일의 5월초순으로 축하이니까 라고 초대되었던 적이 있었다. 밤 주연의 한중간에 먼 곳에서 떠드는 소리. 코리야 총졸의 폴에 턱을 가볍게 쑥 내밀어 「보고 와라」. 명령이다. 폴이 자동소총을 가지고 현장에 간다. 그곳에서는 조선인의 대중이「일본병이 도망했다. 도망자는 일본왕의 명령에 의해 총살. 내라」라고 외치고 있다. 폴은 곧바로 밤하늘을 향해서 실탄 발사. 「돌아가라」라고 이번은 명중하지 않게 또 발사. 그래서 무서워한 군중은 해산했다. 그 직후 안쪽의 수풀로 소리. 보면 몇명의 일본병이다. 두손을 모은다. 코리야 또다시 턱을 가볍게 밀어내기「빨리 가라」라고 손을 흔든다. 일본병들은 도망쳤다. 일본인에 없는 도량이었다. 이러한 추억을 잊을 수 없어서 1955년경 모스크바 방송국에 코리야의 근황을 물었지만 회답에서는 러시아에는 코리야의 이름은 무수히 있으므로 조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부터 60년 가깝게 경과했다. 살고 있는지 죽어 있는지?

손가락을 격자로 만들어 감옥의 싸인
때때로 북한 보안국으로부터 린조(隣組)경유로 노동자의 요청이 있었다. 이것은 반강제적인 요청에 준한다. 물론 임금은 지불된다. 노동자의 인원 부족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 같다. 전목수직은 신정부 수립을 위한 건조물의 건설 기술이 없는 사람은 일반 노동으로 나도 다채로운 노동에 종사했다. 예를 들면 지붕 기와의 수리. 벽에 도장할 때에 사용하는 코테(바른 페인트를 평평하게 할 때에 사용하는 쇠장식)의 사전 준비. 이카다의 운반. 자갈의 선별등이었지만 제일 곤혹한 것은 소련병이 된다 라고 하는 요청. 이 요청을 받으면 즉각 국적 변경해 러시아인이 된다. 이 건은 아마 동의의 아래에서 실시되어 받은 사람들은 지금은 완전 러시아화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 더 오호츠크해의 어선원 모집의 건. 시기는 1년. 일시금으로 미 일표등 있었지만 나는 인양 시기가 가까워서 거절했다. 미 일표는 매우 매력을 느끼고 이것에 의해서 나를 제외하고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련측에서는 전 일본병은 도망의 위험이 있지만 원래 조선 거주 일본인은 그 위험이 근소라고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것에 응모한 것은 조선 각지로부터 약2000명. 1년후 무사히 조선에 돌아가 일본에의 인양도 완수한 것 같지만 대우가 의외로 양호했기 때문에 벌써 1년이라고 잔류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빴다. 그 냉전에 의해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현재의 현지에서의 생존자는1~2이름 밖에 확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운명의 문. 이 문을 하나 잘못 열면 모든 운명의 톱니바퀴가 이상해진다. 그 때 소련 응모의 북양 어업에 응모하고 있으면 아마 죽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젊은 소련 병사의 회화로부터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군대이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인이다. 아무리 교육해도 본래의 민족과 인간 특유의 본능이 가끔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면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 현저한 예가 욕망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군대이니까 모두가 평등하다 라고 은밀하게 믿고 있었지만 과연 그 실태는? 소련 군병사는 계급에 의해서 급여품이 크게 상이한다. 예를 들면 담배. 일반병은 가루 담배를 손재주가 있게 신문지로 둘레와 감아 들이마신다. 소위클래스가 되면 보통 종이 궐련. 마이요르(소좌)에서는 입첨부로 상등의 담배. 더 이상의 각하은 간단하게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불명하지만 아마 이 순서에 실수는 없을 것이다. 후레이브(러시아풍빵) 폭과 높이는 어느 쪽도 대개 15센티미터 길이는 30센티미터는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것도 조금 전의 차례로 보통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흑빵. 일본의 빵과 상이해 감미가 없지만 일상식으로서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마이요르 이상은 흰색 빵. 아직도 차별은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조금으로 자세한 것은 불명하다.
여자 소련 병사 연령은 상상하면18~25재위. 나막신 기(녀용이 홀쪽한 가죽 장화 천 제품도 있다)를 신고 스커트를 신게 하는 것은 좋지만 자동소총을 어깨에 걸면 무섭다. 중에는 신음소리를 내는 미인도 있지만 남자와 달라 곧바로 감정 드러내 돌진해 온다. 이러한 여자 병사에도 아는 사이가 생겼다. 타니야 토니야 등. 이러한 미인 병사 추녀 병사 지금은 80세이상으로 노쇠해지고 있을 것이다. 만사가 꿈이라고는 이것이다.
병사는 아닌 다른 일반의 주부는 어떠했는지. 이것은 동양 서양 관계없이 잡담으로 분위기가 살고 있었다. 당시 어느 선생님이「나는 국빈 취급으로 러시아와 동구 제국을 방문했지만 학교 의료는 모두 무료. 타락 한 자본주의의 본가 미국과는 다르다. 각각의 국민은 모두 건강하고 밝은 생활을 보내고 있다. 완전히 감탄했어요」라고. 실정을 알고 있는 내가 그것은 전혀 다르다 라고 말해도「무엇이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라고 역반격. 노동의 기관지도 이러한 논조였다. 현재는 폐간이 되어 있는 미국의 Leaders Digest. 이 책은 당시 세계에서 구독되고 있던 유명한 잡지이지만 이 잡지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발명이나 발견이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말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었지만 과연 실정은? 원래 러시아 민족은 주로 유럽 민족이 주체로 우리 섬나라와 달라 유럽 민족과 선조로부터 피가 연결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 이민으로서 이주해도 피부의 색도 같아서 우리 유색 인종과 비교해도 저항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 내부의 상세를 이민한 친척이나 지인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러시아인 주부의 잡담이지만 이웃의 소문이나 식료나 생활품의 화제 외에 미국의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은 훌륭하다. 멋진 자가용차가 몇대나 있다. 훌륭한 주택에 살아 식료는 배급은 아니고 자유롭게 좋아하는 것을 산과 같이 구입하고 있다!」 과장된 몸짓으로 이야기한다. 정답인 것은 충분히 알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당시는 마음이 괴로왔다. 패전국민의 한심한 감정으로 가슴 속이 가득했다. 그런 잡담의 한중간「펄차(당원)가 왔다!」 전원 눈 깜짝할 순간에 없어졌다. 공산당원. 표면에서는 존경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친한 조선인이 작은 소리로「아아. 지금부터 어떤 시대가 되는 것인가. 제일 무서운 것은 공산주의다. 뭐 나 진실의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원이 되기 위해서 일상생활부터 점수를 붙여진다. 이른바 추천의 형태이다. 누구나가 당원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학문도 학문이지만 제일 우선하는 것은 물론 사상다. 여하에 공산주의 사상의 소유자일까. 이것은 꽤 난문인것 같다. 무사 당원이 되면 이번은 세포 만들기이다. 어떻게 해 동조자로 게다가 확실한 사상의 소유자의 조직을 확대할까. 이것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과 병행해 반혁명자의 통보이다. 왜냐하면 모처럼 고생해 혁명을 달성했는데 만약 또 반역자에 의해서 저지되면... 이런 운명은 그들 자신이 제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시 반혁명자의 명부를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물론 대우는 일반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어느 당원이 극단적으로 통보의 건수가 근소라면 심문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례를 들면 소련의 경우 아내가 당원으로 남편이 반혁명자라고 판명되면 체포나 사살하는 권한까지 아내에게 있다. 그렇게 불합리한. 그런 세계는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너무나 무섭다! 이것 밖에 표현하는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표면으로부터 관찰하는 소련병은 치안이 회복하는 것에 따라 다소의 변화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대우의 레나택도 매일 일이 있을 리가 없지만 일을 기대해 소련 군인의 각가정을 방문한다. 안에는 대우의 나쁜 가정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레나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나날의 식료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기 나온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부인이 가지고 있던 그 일본인 독특한 옷(기모노)이다. 이전 옷(기모노)를 조선인에 많이 매각하고 있었지만 가격 쪽은 별로 고액은 아니었다. 이것을 소련 부인에게 매각하면? 나는 성질이 급하다. 곧바로 옷(기모노) 2매 가지고 아는 사람인 레나택에 갔지만 레나의 얼굴을 보고 변심 했다. 한 장은 비(緋)의 기모노 속옷(나가쥬방). 젊어도 불심이 나와 그것을 선물 했다. 그녀는 만면의 미소를 띄워 곧바로 군표의 가격표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해 불충분한 러시아어로 말한다. 뭐라고「내일. 많이」라고 하는 의미다. 떨리는 나의 손에는 가격표의 군표 무려500엔. 당시 일급 60엔의 시대이다. 그러면 이라고 하는 것으로 부근으로부터 옷(기모노)를 모은다. 10매는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인형의 재현이 될지 모른다. 다음날 레나택에 가 문을 노크 한다. 그녀 나왔지만 일견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예의 기모노 속옷(나가쥬방)을 입고 있는 것은 좋지만 띠를 붙이지 않고 한 손으로 그것을 누르고 긴소매의 양단은 각각 재봉실로 고정하고 있다. 어떠한 나라에서도 여자의 마음은 평등하다. 그 때 소년 시대를 탈각한지 얼마 안된 나에게는 눈부시게 반영했다. 현재라면 색 개화도 빠를 것이지만 전쟁 그리고 패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라고 하는 생활로 생명의 보증도 모른다. 그러한 일을 상상하는 편이 무리였던 것이다. 「너 재즈라는 것은 돈에 근심이 없고 훌륭한 신사복을 입어 만족하는 식사를 하고 나서 듣는 것이야....」 이것은 패전 후 몇 십년도 지나 말해진 말이다. 그리고 당시는 초등 학생으로부터 군국이 교육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생각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곧바로 소련 부인들의 무리가 생겼다. 그리고 가격도 묻지 말고 옷(기모노)의 쟁탈전. 일착 500엔이라고 내가 외친다. 제일의 인기의 옷(기모노)는 그 선명한 비(緋)의 기모노 속옷(나가쥬방). 모두가 끌어들여 서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곤혹했지만 "귀찮기 때문에 1000엔" 라고 말한다. 그녀들「조금 전은 500엔이라고 말했지만」이라고 불평한다. "여기서 팔지 않아도 좋은 그러면 돌아간다" 라고 외치자 곧바로 나의 부르는 값으로 거의 매각. 재고품은 2점 정도. 팔리지 않고 남은 옷(기모노)는 수수한 여(絽)의 옷(기모노). 그녀들은 원색에 가까운 색채가 좋은 것 같아서 동양적인 색채는 전혀 인기가 없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약7000엔의 이익. 꿈과 같은 큰 돈을 얻었던 것이다. 이 소련 부인에게의 옷(기모노)매도는 내가 최초였던 일일지도 모른다.
흰색이 흑에의 대변혁이 발생한 것은 9월 무렵. 북국이지만 황색에 변화한 포플러 가로수의 나무들의 잎이 한결같게 낙하하고 있었다. 패전의 상심. 희망이고 뭐고 상실하고 단지 허인 매일의 연속이었지만 계절만은 그 굉장한 엄한도 때때로 봄의 기대도 직전의 어느 날. 시장은 변함없는 인파로 뒤끓고 있다. 변변한 쇼핑도 할 수 없다. 지금은 정말로 궁핍한 일본인의 무리. 거기에 비교하고 조선인이나 얼마 안되는 중국인과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복장의 소련 부인의 무리. 이러한 사람들은 전승 국민등에서 가격표의 군표 100엔 지폐를 아낌없이 남용에 가까운 형태로 쇼핑을 즐긴다. 그 때「수토셰이(사람을 부르는 표현)」라고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되돌아 본다. 아. 당분간 이전에 고대우 그리고 그 인형이나 옷(기모노)로 신세를 진 소련 부인 레나다. 남편도 동반하고 있다. 싱글벙글 하면서 빠른 말의 러시아어로 무엇인가 말한다. 표정으로부터 헤아리면 나쁜 이야기에서는 없을 것 같다. 나도 할 수 없는 러시아어로 좀 더 천천히 이야기해 주어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요약하면「좀 더로 귀국하지만 자후트라(내일)」라고. 이것은 귀국을 위한 일을 의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튿날 아침 빠른 걸음에 레나택에 갔다. 과장된 표정으로「방에 와라」 놀랐다. 훌륭한 맛있는 음식의 큰 떼. 그리고「먹어라」라고 한다. 일은? 「후쇼우 라보타 니엣트(일은 전혀 없다)」 내가 놀라고 있는 도중 또 한사람 일본 부인의 손님이 왔다. 이 부인 러시아어가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 전부 일본어로 레나에 감사 감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레나 신경쓰지 않고 빠른 말로 러시아어. 인간의 감정의 소통은 언어 만이 아닌 것이다! 호화로운 식사의 한중간 일본인의 부인은 한탄하는「아아 이것이 평화로우면」라고. 수십년 후 지인이「당신은 러시아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즉답 "그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있다" 라고. 이 회답에는 절대거짓말은 없을 것이다 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정(情)"은 인종이 상이해도 그리고 국제간에서도 훌륭하게 통용되어 잠깐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다.
자택 부근에 소련 군인의 숙소가 점재하고 있던 관계로 대부분의 소련 병사와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불상사 등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 한 명의 병사가 부근의 조선인 주거에 침입한 것 같다. 그것을 소련 헌병이 발견해2~3명으로 추적한다. 이 시기가 되면 어느 정도의 군율이 확립해 있었을 것이다. 쫓기는 병사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도망한다. 안면을 살짝 보면 울고 있는 안면에는 눈물의 흔적이 전혀 없다. 이런 상황은 재삼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눈물샘이 없는 것인지도 몰라? 패전전 일본군에 쫓겨 퇴각할 때는 이 같았다고 책에 기재되어 있던 기억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눈 앞에서 체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신속히 약탈범이 체포되면 우리 일본인도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지만! 일설에 의하면 소련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100만명의 손해를 각오하고 제일선 부대는 모두 죄수 부대를 가져 공격해 온 것 같다. 그러니까 전장이나 또 점령직후는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등은 일상다반사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수 부대가 아닌 후속 부대가 오면 그 사건의 수가 감소했다고 하는 점도 납득이 가는 것 같다. 어쨌든 전쟁은 살인으로"죽이지 않으면 살해당하는"이 통상으로 게다가 죄가 없는 일반 서민이나 아이까지도 피해를 받는다. 특히 조선 북부가 전장이 되어 필사적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의 정말로 비참한 상황을 눈물을 흘리며 재삼 들었던 적이 있다. 정부가 잘못된 군국주의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런 비참한 사실이 발생해 버렸다. 그러니까 정부 고관 그 지도자가 그 책임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전쟁의 잔학에 대해서 일본군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패전전에 조선에서 해군무관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지만 방화를 자랑으로 여기는 군인도 존재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느 부락을 점령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이동할 때 자신있는 방화의 연속이다. 그것보다 비참한 것은 용의자를 발견하면 다짜고짜로 죄도 없는 아이도 포함하고 우물에 매달고 위로부터 총검으로 찔러 죽인다. 또 식료 조달을 위해서 민가에 침입하고 주민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양식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돼지를 빼앗고 젊은 주부를 참살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무관이「아아」라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광경이 지금도 머리에 잔류하고 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아주 일부 분의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절대 재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