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의 여름은 특히 더워서 혹서였다. 8월 9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수십량의 기차로 만주(満洲)로부터 남녀노소가 평양(平壌)에 피난해 왔다. 소련의 선전포고의 결과이다. 피난민들은 각 일본인 주택에 할당하게 되었다. 거의가 군 관계의 가족으로 일반 피난민은 별로 없었다. 난민의 가족은 훌륭한 물건들을 지참해 온 것 같다. 소문에 의하면 최고 간부의 가족들은 종졸(従卒 : 부하 병사)도 함께 거느려 온 것 같다는 것이었다. 3~4일 후의 8월14일의 한밤 중은 굉장한 호우. 무엇이 일어났는지 침실에 있던 천황 황후의 사진이 상인방(鴨居)으로부터 흙탕물과 함께 낙하했다. 당시 일본인의 집에는 반드시 진영(御真影 : 사진)이라고 칭해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 첫 사건으로 가족 전원이 무언인 채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큰 한숨과 동시에 「일본이 졌다!」 그것은 다음날 잊을 수 없는 8월15일. 그 패전의 날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학교에 등교하면 예의 날카로운 소리로「학교는 당분간 휴교. 또 일본에 돌아가는 것도 좋다!」. 학우이며 친구인 조선인의 전(全)군「아아아아! 나는 일본을 신용해 일본인뿐인 이 학교에 무리해 입학했다. 그것이 안되게 되었다. 어떻게 하지!」라고 나의 손을 꽉 쥐었다. 다른 일본인 학생은 무언인 채. 전원 머리가 혼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는 일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원이 떠드는 「일본의 연합 함대는 아직 있는데!」 실제로는 함대가 거의 전멸 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당시는 보도 기관의 검열이 엄중하고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연일 육군기가 몇백도 날아 다니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른 봄 전(全)군이 만주(満州)에 갔을 때 몇백의 일본 정예기를 보고 「미시마(三島)군 일본은 괜찮다」라고 한 말도 있었으므로 완전히 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면적인 패전은 믿을 수 없었다. 직접 라디오를 들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 돌아가는 이라고 말해도 일본의 어디에 돌아가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부모님이 빨리 조선에 온 관계로 일본 본토는 전혀 모르고 간 경험도 없다. 나와 같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패전 시 일본인은 60만 정도 거주하고 있던 것 같다.(당시의 조선인의 인구는 3000만. 50명중 1명은 일본인으로 주로 도시지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양은 패전일을 아무 일도 없게 평온으로 맞이했지만 야밤중 평양 거주의 육군 사단장 부인의 손에 의해 평양 신사는 전소했다. 평양(平壌)으로부터 조선 북부의 나진(羅津)등의 지방도시까지는 800킬로미터 있어 중대 전황인데 별로 비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곧바로 일본군 정예기가 적을 격퇴 반격으로 옮겨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점령이라는 희소식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이라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 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지했던 것이다. 그것이 패전 후일이 지나는 것에 따라 진실이 판명되어 왔다. 우선 청진(清津)방면에서는 소련군의 맹렬한 함포 사격아래에 상륙 작전을 전개했지만 일본군 조선 지원병의 대반격을 받아 포로 2000명을 남겨 퇴각했다. 일본군은 그 때 포로를 강당에 집합시키고 도망을 막기 위해인가 외부로부터 열쇠를 설치해 방화해 퇴피한 것 같다. 그 보복을 위해 퇴피할 수 없어서 남겨진 사람들은 잔혹한 눈에 있던 것 같다. 도망해 온 지원병의 이야기에 의하면 소련군과 전투를 섞은 장면은 꼭 술래잡기와 같고 발견된 병사는 총탄의 표적으로 된 것 같다. 「 나조차 적어도 10명 이상 사살해 게다가 육탄으로 전차 한대를 격파했다」라고. 「만약 일본이 패배하지 않으면 금석훈장(金賜勲章)은 틀림없었다」라고 해 실망해 돌아갔다. 대동아전사(大東亜戦史)에 의하면 제일의 목표는 청진(清津). 무선국이 공격받아 국장 이하 가족모두들 살해당한 것 같다. 국장명은 타구치(田口)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타나베(田部)라고 하는 국원이 있어 청진(清津)의 국장이 된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완전한 증언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패전 3일째의 평양에서는 조선 원래의 국기인 태극기(太極旗)가 시내 각처로 내걸어 시작되었다. 태극기와는 한일합방전의 구 대한제국의 국기이며 일본 시대에는 반드시 보는 것은 불가능으로 그것이 발견되면 당연히 엄벌의 대상자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나는 패전 전에 1회만 친(全)구의 전군에게 은밀하게 보여졌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는「이 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수 있을 것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보여지지 않는 기다. 이것이 알려지면 나의 생명이 위험하다. 부탁하기 때문에 다른 일본인에게는 말하지 말아줘」라고 손을 잡았다. 나는 이해했다. 나는 그 때 이 기를 처음으로 보았지만 언제의 날이나 허공에 게양되면 좋지만...라고 말해 말끝을 흐렸다. 그 때의 나의 머릿속에서는 내선일체(内鮮一体)라고 말해 항상 조선 총독부(朝鮮総督府)가 외치고 있던 말이 공허하게 허무하게 날아갔다. 한층 더 그가 나에게 보이게 해 준 것은 전쟁전의 화보이지만 미국에서 발행된 일본어판으로 표지에 크게 만화로"일본은 약한 견들 동료가 된" 이것은 일독이(일본.독일.이탈리아) 삼국 동맹을 가리키고 있는 만화였다. 그 외 여러 가지 있었지만 어디서 입수했는지 일절은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진짜 조선 내부의 사정에 귀를 기울인 경위가 있었다. 나는 전(全)군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신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패전 나중이 되어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패전 3일째에 본 태극기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 놀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본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념이라든가 혹은 지금은 안되지만 언제의 날인가 이 보복을 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던 것 같다. 일반 일본인은 이른바 표면만으로 깊은 속에 있던 조선 민족의 본심에 무지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걸 수 있었던 태극기는 건재했던 일본군의 손에 의해 찢어졌지만 몇일 후 또 복원되었다. 물의 흐름에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때의 정예 군인들은 비분의 극한으로 평양 비행장에 비행기와 함께 자폭을 결행한 사람이 존재하거나 옛 무사(古武士)에 준거해 일본도로 할복자살(切腹)한 몇명의 장교도 소문에 들었다. 이것들 순진한 청년도 군국주의의 희생자의 일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 분들의 상황을 나라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 그리고 친척의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몇번이나 기재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 비유 군인이든지 군국주의 초국가주의를 위한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패전 후 얼마간도 없는 저녁때. 야음에 숨어 아는 사이 전 경찰관2인이 무엇인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자택에 가져와 「우리는 아직 무거운 짐이 되는 처자도 없다. 지금부터 소련군이 들어 올 것이니까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조선 남부에 도피한다」 그 만큼 말해 곧바로 떠났다. 그들은 판단이 좋았던 것이다. 그대로 불평의 하나도 말하면서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으면 당연히 시베리아행이었던 것이다. 어디의 누구였는지 이러한 사람의 이름은 불명. 아버지는 「조금 와라」라고 가족을 모아 예의 보자기를 귀찮은 듯이 열었다. 나온 물건은 당시 사용한 조선 총독 제정의 순경의 하계용의 제복2벌. 색은 엷은 녹색색과 제모. 아직 오래되고 있는 모습은 없다. 아버지는 「이것은 좋은 것을 받았다. 지금은 의류도 극단적으로 부족하니까 이용하면 충분히 도움이 된다」 갑자기 어머니는 외치는 「안된다! 지금부터 어떤 세계가 되는 것이든지 지금까지의 일본 시대와는 다른 세계가 될지 모른다. 만약 그처럼 되면 의심되는 것만으로 대 손해 본다. 태워! 태워!」라고. 이 어머니의 한마디로 시국에 서먹했던 아버지도 깨달았던 것이다. 상상하는데 어머니가 부모 에 이끌리고 조선에 온 것은 6세의 무렵. 아버지가 조선에 온 것은 20세의 무렵. 어머니는 그 한일합방 직후에 조선에 왔으므로 다양한 장면에 조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든 조선의 치안도 안정되고 있던 20년 후에 아버지가 본 조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 조선의 정세를 반 본능적으로 어머니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택의 뜰에서 30분 얇게 솟아오르는 불길과 함께 일찌기 위엄을 발한 제복도 어이 없게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제일 단계의 재난을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일 없이 회피했던 것이다.
여러가지 사건 추억의 선교리(船橋里). 훌륭한 자택은 아니었지만 극한으로 시달린 사실 수십년 경과해도 그 때의 상황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후의 모습 재견하고 싶은 라고 항상 명심하고 있었지만 최근 그 평양(平壌)의 비디오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응시해 보면 희미하게 그 단편 같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는 군사 지대에서 일반 외국인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의 지대가 되어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기는 원래 군용도로가 종횡에 달려 그리고 치열한 한국 전쟁. 당연히 저기는 미군의 폭격 목표로 짜넣어지고 있어도 불가사의는 없다. 그러니까 현존 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지역이다. 역사의 톱니바퀴겠지만 그 한마디로 그 정경 등은 소리도 없이 소멸. 그렇게 해서 역사는 미래에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아!
당시의 북한 북부도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기재해 보았다. 회령(会寧)은 인구 약4만. 진짜 국경의 마을에서 항상 무장 테러가 침입하고 있으므로 물론 각 사단을 배치. 헌병은 사복으로 테러 대책에 분주 하고 있던 사실이 있어 그 때문에 일본 군병사의 급여는 다른 조선 각 사단의 병사보다 고액이었다. 라남(羅南)은 일부 기재하고 있지만 여기는 가장 일본의 도시와 닮아 있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성진(城津)은 청진(清津)과 함께 조선 굴지의 어항에서 인구 약1만. 그 중 일본인은 2500명이었다. 길주(吉州)는 교통의 요소에서 농산물의 보고에서 그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군이 조선 원정때 가토기요마사(加藤清正)의 부하 카토키요베에(加藤清兵衛)이 수백의 군사로 칩거(籠城) 해 위험하게 키요마사(清正)에 지원을 찾은 사실이 있다. 청진(清津)은 일본해의 부동항에서 일본 본토 혹은 만주 방면의 교통의 요소에서 인구 약4만. 웅기(雄基)는 소련 중국에 인접한 양항에서 인구 약4만. 원산(元山)역 부근은 일본인의 상점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함흥(咸興)은 인구4만. 교통의 요지로 일본군의 사단도 상주해 농업 수산업 거기에 공업도시로서 발전하는 도상이었다. 이상 각 도시는 동계에 있고는 한기라고 하는 것보다 극한의 토지였다. 그러한 각 항을 경유해 대다수의 의용군을 만주 각지에 보냈다. 의용군과는 당시의 청소년을 이바라키현(茨城県)우치바라(内原)에서 훈련한 지금에 말하는 무장 농민이었지만 그들의 최후는 정말로 비참했다!
원산(元山). 여기에도 비행장이 있어 이전에는 여기로부터도 오키나와(沖縄)에 특공대가 출격 한 기지에서 만났지만 어쨌든 무기 부족을 위해 몇회째에 상륙을 허락했던 것이다. 성진(城津) 함흥(咸興)도 같은 전황이었지만 평양(平壌)에는 이러한 상세가 연락 불충분하고 닿지 않았다.
나진(羅津)은 1945년8월8일에 백산환(白山丸)이 출항한 것이 마지막 배로 9일에는 소련군의 함포 사격에 의해 대부분의 민가가 분쇄되어 도망할 수 없었던 환자 노인은 자살한 사람이 상당히 있던 것 같다. 웅기(雄基)도 같은 것. 회령(会寧)은 일본의 회령 사단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의지해 필사적인 생각으로 무수한 난민이 밀려 들었다. 그러나 그 전에 헌병 그리고 경찰이 주된 공공물에 방화해 철퇴. 그 때문에 난민은 지리멸렬. 회령(会寧)거주의 일본인 약8000명의 사람들도 비참은 같고 당연히 가족 뿔뿔이. 다행히 남쪽으로 탈출해 거기서 우리 아이를 발견한 사례도 있지만 일가 전멸.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부녀자나 아이까지 정렬 당해 총살. 일본군에 피난로를 길 안내한 이유로 30대의 부인도 총살되었다. 이 소식이 명백해서 사토(佐藤)내각의 시대에 군속 취급으로서 인정되었지만. 아아. 말도 안 된다!
1945년 초봄의 무렵이었지만"곧 있으면 독일은 패배한다. 그것이 정해지면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해 소련은 한꺼번에 국경선을 돌파해 만주(満州) 조선에 침공할 것이다. 그 때의 운명은?"이런 식으로 웅기(雄基)에서 때때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의 맹공으로 군은 비행기 1000기 그리고 전차 2000대를 조선으로부터 철수해 본토 결선에 준비. 일본 각지에 분산 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조심하고 있던 날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 인양선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들은 실화이다. 현재 그 시대를 살아 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동정하면서"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때와 시대가 완전히 격변 하고 있다. 평화 노망의 시대의 탓인가. 과거의 역사를 관찰하면 모든 전쟁이 필연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돌연 기습된 역사도 있다. 이 상태를 타처로부터 인용해 조금 돌아 장황하지만 아프리카의 일부의 토인은 미개발의 토인이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이것을 퇴화 한 민족이라고 말하면 전혀 차원이 다르다. 겉가 뒤가 된다.
전란 중 이므로 주민의 일본인은 당연하고 조선인 그리고 중국인도 집단에서 피난했지만 안에는 행운인 사람도 있고 8월15일에는 평양역에 도착 그리고 단번에 부산까지 도착.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도 실재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일본 패전에 의해 중요한 일반 조선인은 일본인에 대해서 어떤 태도였는지? 조선도 최북부의 소련 중국(만주)에 접한 지방은 혼란이 상당히 있던 것 같다. 혼란이라고는 해도 이것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몇 십년도 일본 통치로 생활해 반일적 언동 또는 경제 위반 등을 실시하면 이것은 당연히 단속의 대상이 되었지만 일반 대중이 보면 그것은 그저 소수였던 느낌이었다. 이른바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완전무장의 소련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대단한 일이었는데 틀림 없다. 거기에 언어의 문제. 일본군과 협력해 활약한 것은 조선의 지원병으로 응소로 통지를 받은 조선의 일반인(당시 조선인에도 일본인과 같이 징병의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는 응소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전황에 민감하고 대국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 여러가지 있지만 어쨌든 피난에는 일본인 조선인 조선에 재류하고 있던 중국인 모두가 집단적으로 피난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모두 자신 미래가 불안했던 것이다.
그 점 평양은 전란에도 말려 들어가지 않았고 전장으로부터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므로 10월의 소련군 입장까지는 아주 평온으로 행정 특히 배급 등은 전혀 이전과 변화가 없었고 일본인에 대해서도 일부에는 있던 것 같지만 만주등에서 발생하고 있던 약탈이나 폭행의 종류가 귀에 들려온 것은 거의 없었다. 일이 없어서 저축도 없는 관계로 일본인회에 모인다. 거기는 잘 한 것. 조선측으로부터 각 노동자의 의뢰가 잇따랐다. 노동이라고 해도 훌륭한 일은 있을 리는 없다. 모두 육체 노동이었지만 약속 대로의 임금. 낮의 식사 등은 당분간 볼 수 없었던 백미의 식사가 많았다. 소련군입장 후도 당분간 이러한 상태는 계속했다. 그러나 군이나 경찰의 관계자는 예외였던 것 같지만... 어느 혹서의 날. 자갈을 구분하는 일을 했다. 구분하는 것은 나 혼자. 감독은 3명. 그것도 응달로 약일주일간. 지금 생각하면 젊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은 대단했지만 식사는 훌륭한 것. 낮은 느긋하게 쉬고 라고 배려가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약속의 일당60엔의 곳 80엔을 받았다. 그리고 격려이기 때문에인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일반 서민은 이런 것으로 이것이 국가 권력이 개입하면 선의가 악에 변화한다. 그리고 1개월 후 우연히 그 고용주의 한 명에게 재회했다. 그는 「 나는 최근까지 일본의 후쿠오카(福岡)에 살고 있었지만 돌아와 실패했다」왜? 「후쿠오카(福岡)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뿐만 이었다. 희망에 불타 돌아왔는데 얼굴도 모른 사람만. 아아」라고 말해 얼굴을 숙였다. 이런 사람들의 발언은 모두 말소되어 버려 재일 조선인은 입을 모아 일본의 악행만 말한다. 우리 일본인도 전쟁 전의 실패만을 목소리를 높여 한탄한다. 이것이 현재풍인가!
조선의 친구의 전(全)군「나의 자택에 와 줘」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알린다. 그의 좁은 방에 방문하면 20명정도의 사람들이 나를 가리켰다. 전(全)군은 통역으로「지금 평양역은 피난하는 사람으로 충만하고 있다. 당신들 일본인은 져 외국의 군대의 무서움을 모른다. 우리는 선조의 시대부터 그 경험을 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모두 알고 있다. 당신들은 일본의 군대가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일각이라도 빨리 남쪽으로 도망쳐 가 줘. 남쪽은 안전하기 때문에!」 전원 외치면서 나에게 머리를 숙인다. 전(全)군과는 마음이 통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우정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고마워요 라고 인사를 해 귀가했다. 즉시 부모님이나 지인에게 이 건을 알린다. 「그 때는 그 때에 모두 함께 돌아가면 좋다. 지금 여기서 떠들어도 아무것도 안 된다」몇회 설명해도 이러한 반응. 나는 실망했다. 어쩔 수 없다! 아아! 그들은 선조의 시대부터 몇번이나 이런 피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 일본은 일방적으로 돌진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되었는데!
일본어 방송도 8월15일 이후 딱 중지. 라디오는 조선어 방송만. 패전이 될 때까지의 "조선 그 자체가 일본이다. 여기 조선이 일본이다" 라고 하는 신화가 서서히 붕괴해 왔다. 당시 평양(平壌) 거주의 일본인은 26000명. 만주(満州)로부터의 난민 12110명. 청진(清津) 나진(羅津) 웅기(雄基) 등 조선 북부의 함경북도(咸鏡北道)로부터의 난민 3150명의 자료가 있지만 실제는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외에 무수한 일본병으로 충만하고 있었다. 난민이 된 사람들은 아마 평양이 희망의별로 보였을 것이다. 전(全)군 이런 상태가 되어도 재삼 걱정의 얼굴로 내방. 그리고 「왜 빨리 남쪽으로 가지 않는 것인가. 지난 번의 이야기는 미시마(三島)군 일가를 살리고 싶은 진짜 이야기였던 것이야. 네가 없어지면 나도 한 손을 잘라 떨어지는 정도의 충격으로 슬프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너도 뭐도 악행을 하고 있지 않는데!」
때때로 도로에서 원래 반일 사상의 소유자의 동급생 김(金)군을 만났다. 「오오. 오래간만이었다. 미시마(三島) 군에 대해서는 악감정은 전혀 없어. 무엇인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 줘. 그런데 전(全)은 일본인인 군과 친한 것 같다」 후일 심려 하는데 혹시 전(全)군은 나와 친했기 때문에 생명 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全) 군을 이야기할 때의 김(金)의 수상한 눈. 지금도 생각해 낸다! 전(全)군과 같은 경우의 사람들은 실재했을 것이다. 나도 조건이 갖추어지고 있으면 전(全)군과 혼란에 숨겨 일본에 함께 망명하고 싶었다. 무사히 망명을 달성한 사람들도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
전(全)군 방문해「오늘 나의 집에서 너의 모르는 사람들을 소개할게!」 가 보았다. 실내에는 5명만. 모두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패전이 되어 또 이야기의 내용으로부터 변심해 본래의 조선인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에게 항의와 질문을 겸한 회화이다. 「일본은 내선일체(内鮮一体)라고 하면서 대신을 한 명도 내지 않았다」 당시 나도 군국 소년으로 연령도 18세 지금의 연령에서는 19세. 일단 상황은 알아 해 패전이라고 해도 나는 일본인. 일본 시대에는 일본인과 동일하고 「나는 대동아의 맹주. 이른바 아시아의 주인」이라고 칭하고 만주에 가도 잘난체 하고 있던 것 같다. 그것이 일본패전이 된 바로 그때 조선 독립 만세인가. 조금 뻔뻔스럽다. 실제의 곳 1938년 첫 지원병을 모집했는데 무려 그 배율은 60배로 안에는 대학 진학을 버려 응모한 청년도 있었던 것이다. 또 1945년 제국 의회는 중의원에게 조선인7명을 인정한 과거가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 특공대에서 조선인도 포함해 무수한 희생을 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반론했지만 그들도 비율 냉정하다. 「어떤 나라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기분은 하나야」 역시 그들의 사상과는 전혀 상위한 이라고 생각했지만 알아 주는 부분도 있었으므로 나 자신 안심했다. 마지막에 그들은 「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나라를 만들므로 큰 일이다. 새로운 그리고 완전 독립인 조선국을 건설한다. 일본도 패전국에 전락했지만 신생 일본은 평화로운 국가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발언도 당당하고 있어 이것은 내 쪽이 패배 한 느낌이었다. 혹시 북한의 간부에게라도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지만 본명을 망각해 버렸다. 왠지 친구의 전(全)군은 한마디의 발언도 없었다. 그들이 신생 국 만들기에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피부로 느꼈지만 나는 그 때 정도 암담으로 한 희망도 꿈도 없게 무념이라고 하는 구상으로 머릿속이 진백으로 비참한 생각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과거의 영광이 머릿속 가득해 장열적진에 돌진한 특공기 혹은 당시 국민의 마음의 정이었다 그 무적 연합 함대의 웅자가 머리를 지나갔다. "나라 망해 산하 있어(国破れて山河あり)"는 틀림없지만 여기는 이미 일본은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익숙한 산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대동강(大同江)의 느긋한 흐름. 볼 것 듣는 것이 전부 일본은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나를 시작해 학우의 대부분이 조선 태생. 완전하게 우리는 여기도 고향의 일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의 전(全)군은 완전한 무언. 그의 가슴 속을 헤아리면 우리 이상으로 복잡했던 것이다. 일본을 믿어 그는 그만의 희망과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치원 시대부터 나와 동기가 된 상업학교까지 일관해서 일본인만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전 문득「나는 장래 외교관이 되고 싶은 희망이 있다」라고 말을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는 완전하게 일본인화하고 있었지만 그도 혼란 그리고 무념이었던 것이다. 저런 일 없으면 나와 그와는 혈육을 나눈 형제같은 친교를 거듭했을 것이다. 최근 연령을 거듭할 때 마다 그의 비명이 귓전으로 들리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이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이런 마음의 희생자는 지금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살아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최악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인가. 그 나라이니까 후자가 맞고 있는 생각하지만!
최근 TV로 분화를 위해 섬으로부터 피난하고 있던 일본의 미야케지마(三宅島) 주민이 일부 귀환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일부 제한은 있지만 서서히 관광객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은 불행중의 다행이다. 태어나 자란 섬의 감각이나 분위기. 이것은 이 섬의 주민 밖에 모른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작은 행복하다. 옛 배움사도 있다. 전원은 아니지만 아는 사이에도 재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고향의 냄새이며 감정이다. 나의 경우 그것들이 모두 외국이 되어 재방문이 곤란한 현상이다. 미야케지마(三宅島)의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보지만 그 사람들은 재해에 있어도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상태를 보고 마음에 선망과 같은 것이 끓어 나오는 것도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風の音にも 想い出す アナ懐かしき イニシエに 波乱の風に 憂いあり 置き去り墓標 朽ち果てし 同胞悲し 我が身震るらん(바람의 소리에서도 생각해 낸다. 그리운 옛 파란의 바람으로 슬픔 있다. 방치의 묘비도 헛되이 죽어. 동포 슬퍼서 나의 몸도 떨린다)"
아직도 유골 수집을 할 수 없다 것이다.
홍(洪)중장은 정말로 불쌍했다. 병합 당시는 한국 육군 소장이었지만 승진해 일본 육군 중장에게까지 된 사람이다. 전시 중 운 나쁘게 마닐라의 포로 수용소장이 되지만 전후 그 책임으로 군사재판으로 교사형(絞死刑)에 처해진 악운이었던 것이다.
병합 직후의 일면을 통계적으로 나타내면 일본 시대에는 경제 성장률은 평균 3.7%의 성장. 교육면에서는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으로 학교수는 불과 40교 밖에 없었지만 1940년에는 1000교 이상이 되었다. 그러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 했을 때 각국의 반응은?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등의 나라들이 지원 찬성을 표명하고 있다. 그것이 패전이 되면 사면초가가 되어 이번은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에 5년의 신탁통치안이 나와 있었지만 각각 각국의 내정은 다른 소망도 존재한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도 지금은 꿈과 같이 져 버렸다. 식량의 배급은 이전과 같다. 학교 수업은 없다. 주된 관청은 기능을 잃어버리고 있다. 어쨌든 급여는 없음. 출근도 없음. 그리고 중요한 목적이 없다. 잠시 후 조선인으로 결성한 임시의 정부 기관 같은 것이 성립했다. 교섭을 위해 흑색의 소련기의 왕래가 많아졌다. 우리 집에는 만주로부터 피난해 온 니가타(新潟)출신의 세키모토(関本)씨부모와 자식과 먼 친척의 노무라(野村)씨가 오고 물건을 팔고 식료를 얻는 생활이었다. 일본인회도 결성되어 그 중 통지가 있으면 일제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이상의 인양을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잔돈이 있었으므로 명물의 조선냉면을 작은 식당에서 먹고 있었다. 그 때 젊은 조선인이 근처를 둘러 보면서 전단지 배포. 일본인인 나를 보고 시급하게 떠났다. 이것은 드디어 독립의 초기 단계라고 느꼈다. 밤이 되면 각처에서 개똥벌레의 빛의 가사를 닮은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