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平壌)은 조선 제일 오래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역사를 일본에 적용시키면 쿄토(京都) 그리고 나라(奈良)보다 낡다. 단지 북부의 관계로 기후에 약간 난점이 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동계의 최저 기온은 마이너스 28도나 되는 라고 기록에 있지만 통상은 마이너스 23도 정도이다. 그러나 다행히 동계는 거의 무풍. 거기에 대륙 특유의 삼한사온. 이른바 3일 혹한 4일 온난의 연속으로 4일째에 된다고 안심한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 일본식의 가옥이 적당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일본 본토와 상위한 것은 극단적으로 춘추의 기간이 짧고 갑자기 봄을 뛰어넘어 여름이 된다. 역시 아무리 북국이라고 해도 여름은 여름이지만 조금 나무 그늘에 들어가면 거기는 별세계의 느낌이 있어 시원하고 기분 좋은 온도이다. 그리고 그것도 순간. 9월에 돌입하면 가을은 짧아서 돌연 동계의 도래이다.
1943년 5월 아버지의 항례의 전근으로 이번 임지는 남단의 목포(木浦)로부터 북부의 조선 제2의 도시 평양(平壌)이다. 역으로부터 한 걸음 나오면 역시 도시인것 같아서 그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 노면 전차가 왕래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인 군중의 웅성거림. 대부분의 조선어는 반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단적으로 귀에 들려오는 말은 지금까지 들은 말보다 엑센트가 강하다. 그리고 난폭하다. 예를 들면"Ya"(너라든지 상대를 부른다). 그것이 평양의 경우"Yah"와 어투가 몹시 거칠다. 이것은 조선 뿐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 북부에도 해당하고 있는 점이 많이 있지만... 그 밖에 현재도 잘 알려져 있을 것이지만 조선 남부는 미남자 그리고 조선 북부는 미녀가 많은 것 같다. 실례인 말투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조차 평양 미인이라고 하는 명칭은 유명했다. 그것을 엿보는데 지금은 완전히 유명한 북한의 통칭 기쁨조(喜び組)를 그 판단 재료로 해도 틀림없다. 나는 목포에서는 중학교 평양에서는 정원의 관계로부터 상업학교에 편입했지만 거기서 운명적인 그리고 비극적인 조선인의 전(全)군과의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일본어는 조선 사투리가 없어서 우리 일본인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이 건은 밑에 항으로).
남부 조선어와 북부 조선어가 조금 다르다고 했지만 조선어도 일본과 동일하게 방언이 존재한다. 조선어로 제일 훌륭한 말은 경성말(京城語) 현재는 서울말(ソウル語)이다. 저자도 언제 기억한 조선어일까 불명. 아마 조선에서도 남부의 시골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깨달은 것은 최근으로 때때로 중국 거주 조선족의 사람들과 전화로 통화하는 것이 있어 통신 상대는 일본어로 통하지만 그 가족은 일본어가 전혀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가족과 통화하는 경우는 간단한 조선어로의 회화지만 때때로 전화의 근처에 아이가 있는 것 같고 킥킥 라고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처음은 나의 발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판명된 일은 나의 조선어가 시골 말이었던 것이다! 말은 어렵다. 한국인이 일본어의 방언으로 회화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하 간단하기는 하지만 조선어의 방언은 경기 방언(京畿方言 :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방언) 평안 방언(平安方言: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한 방언) 함경방언(咸鏡方言 : 북한에서도 일본해에 접한 최북부의 방언) 경상(慶尚 : 서울로부터 부산시 부근의 방언) 전라방언(全羅方言 : 목포 부근에서 조선최남단 황해에 접한 방언)이 대략으로 이것을 세분화하면 마지막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신문지상에 게재되고 있었지만 현재 남북으로 분단 되어 반세기 이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과 북한에서는 조선어에 미묘한 차이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나라가 분열하면 영향이 언어에까지 생긴다. 나도 일본인으로서 빨리 통일을 바랄 뿐이다.
4000년. 각처에 역사의 냄새가 난다. 가까이의 전적에서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당시의 기념비가 각처로 보여진다. 일본군 도하지점의 대동강(大同江)에서 하라다(原田)모라고 하는 병사가 현무문(玄武門) 을 찢어 한때는 영웅시 되었던 시기도 있던 것 같지만 귀환 후 그 손무늬를 종에 돈벌이하러 달려 세상의 빈축을 산 것 같다. 당시를 되돌아 보면 선명히 소생한다. 당시의 인구는 40만. 현재의 광역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군부이기 때문에 해군 공창(海軍工廠) 항공 공창(航空工廠) 보병 77 연대(歩兵七十七連隊) 육군 비행 제6 연대(陸軍飛行第六連隊) 통칭 추을사단(秋乙師団) 등 등 몇십만인가의 군인 군속등이 마을에 무수히 있었다. 전철에 승차하면 군도 모습의 장교. 전기 버스(당시 벌써 운행하고 있었다)안은 병사의 한숨으로 충만하고 있었다. 평화시라면 항구를 산책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극단적인 비상 체제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 틈마저 없다. 자택은 육군 비행장의 부근에서 조석 그 이착륙의 소음이 격렬하고 지금에 말하는 공해에 충분히 해당에 적합한 장소였다. 평양 대동교(平壌大同橋 : 별명 人道橋)를 건너면 평양 중심부로부터 평양역에 통하지만 그 전부터 남방2킬로미터의 지점에 후나바시마을(船橋里) 그 역으로부터 더 약2킬로미터 떨어지는데 평양 육군 비행장이 있었다. 역 주변에는 어디도 변함없이 예의 암거래의 거리. 1945년이 되면 극단적인 식량부족. 배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조석의 식사는 비참. 사발 가득하고 게다가 싱거운 죽. 반찬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러나 가끔씩 구제의 신이 있다. 이웃의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항공 공창에 근무하고 있던 관계로 그 백미를 받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무엇에도 바꿀 수 없었다. 조선인의 학우가 말했다. 「아아 고기를 먹고 싶다」 뭐? 고기를 먹고 싶어? 그것보다 쌀일 것이다! 「아니 다르다. 우리는 일본인과 달리 고기는 일본인의 된장국 이상이야」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불고기도 번성하지만 그 점이 일본인과 음식에 대한 차이점의 하나나 되어 있다. 쌀은?라고 물으면 「이것은 어떻게든 된다. 실은 나의 부모님은 가끔 중국에 가서 장사를 한다. 그 물건 발견되면 큰 일이어서 숨긴다」 어떤 방법으로 숨기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열차의 포인트안에 넣는다. 이 안에 넣으면 열차 교환때 밖에 열지 않는다」 저런 틈새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 패전이 되어 다른 조선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저것을 숨기는 방법인가. 일본인은 몰랐을 것이다. 저것은 지금은 말할 수 있지만 아편이야」. 그런가 그랬던가. 패전 후에 진실이 노출해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위가 있으므로 혹시 북한은 그러한 전통이 있고 지금도 생산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택 부근에는 영화관이 있어 원래 오락도 아무것도 없을 때 영화만이 단 하나의 오락이었다. 특히"카토 하야부사 전투대(加藤隼戦闘隊)"는 재삼 상영되었다. 군국 소년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훌륭해서 일본 항공 부대가 적기를 격추하는 장면을 열중해서 본 일이다. 그러나 실정은 전혀 반대의 전황이었던 것이다. 영화 종료해 영화관 밖에 나온다. 최근 거기 부근까지 군인이 충만하고 있었지만2~3명의 군인과 약간의 계기로 아는 사람이 된다. 나보다 연령적으로 조금 위다. 「너 집은 어디야?」바로 부근입니다. 한 명은 톳토리현(鳥取県) 출신인것 같다.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왔지만 우리가 건재한 사이는 절대 일본은 괜찮아」 나도 군대 어조에 변화해 하이 소우데아리마수(네 그렇습니다). 「다음은 너의 차례야」 하이 맛타크 소노토리데아리마수(네 정말로 그렇습니다). 영화관의 선전인 "카토 하야부사 전투대"의 간판아래에서 이와 같이 맹세했다.
아버지의 근무 장소의 무선국은 평양 비행장의 모퉁이에 있었다. 나는 도보로 도시락을 재삼 가져 갔던 적이 있었다. 어쨌든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식량난. 지금은 그런 것 간단하게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간편하게 살 수 있지만 당시는 그런 일상상 할 수 없는 시대. 무엇을 지참했는지. 어차피 쓸모가 없는 이름만의 도시락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군대내이므로 통행증 지참은 절대 조건이었다. 아버지의 신분은 소좌 대우. 그런 관계로 장교의 아는 사람이 생겨 한 명 두 명 때때로 자택에 내방한다. 그 중의 한 명. 아마 성은 나카니시(中西)라고 하는 분으로 미에현(三重県) 출신자. 육군 중위전. 단비라(폭이 넓은 칼)를 가져 당시 손에 넣는 것이 곤란한 술의 한 되병(一升瓶)을 지참이었다. 단순한 장교가 아니고 그 카토 하야부사 전투대(加藤隼戦闘隊)의 생존자로 지금에 말하는 엘리트중의 엘리트. 그 전투대의 부관이었던 기억이 있다. 옆 방에서 아버지와 술을 마신다. 마시면 마실수록 소리가 커진다. 연령은27~28세 정도로 넘치는 젊음의 잔영이 있다. 「미시마(三島)씨. 나는 전쟁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든 그 여성을 하야부사(隼)에 실어 적전 도망이라도 좋다. 단번에 일본 본토나 만주(満州)의 산속에라도 가고 싶다」. 그것도 울먹이는 소리. 그때 부터 어떻게 되었는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완전히 불명하다.
당시의 청소년에 대해서 기본 교육은 어떠했는지? 그 일부를 썼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군국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그 실태의 개요가 떠올라 올 것이다.
이와 같이 구가해지고 있다. 머리의 부드러운 청소년에게 항상 이러한 교육을 하면 이른바 세뇌되어 도리가 불명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이다!
자택으로부터 육군 평양 비행장까지 2킬로미터는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승강하는 군용기의 진로는 우리 집의 상공 약 300미터정도였다. 조조는 목적지로 향해 상승하면서 통과한다. 엔진 전개이므로 경폭격기라고 말해도 그 굉음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것도 몇백기이다. 현재 이러한 소음이 일어나면 공해다 보상금 이라고 대문제가 되지만 당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이 생길 리도 없었다. 탑승원이 육안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리였다. 저녁때가 되면 이번은 그것들이 착륙 몸의 자세가 되어 재차 상공을 통과한다. 강하를 위해인가 엔진음은 약간 저음이 된다. 엔진으로부터 배출되는 배기가스의 창백한 빛은 지금도 눈앞에 분명히 군국 소년의 상황이 방불로서 떠오른다. 전황도 더욱 더 치열해져 갔지만 이상하게 중요 기지인 평양에서는 1944년까지 1회의 공습도 경험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본토와 달라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 민족이므로 미군은 그 점을 배려했을 것이다.
어느 날 특별한 절친한 친구인 조선인의 전(全)씨의 자택을 방문한다. 그의 자택은 좁은 온돌의 하나의 방 밖에 없고 가족은 여동생 혼자서 4세 정도. 모친은 당시에 40대 전반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촌스럽게 얼굴이 닮지 않다. 그러나 좋은 사람인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일본어의 이해는 반정도. 언제 실례해도 기분 좋은 웃는 얼굴로 없는 물건을 쥐어짜 접대해 주었다. 어느 때 전(全)군은 「다른 일본인에게는 보였던 적이 없는. 향후도 절대로 보이지 않지만 너는 특별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야기하지 말아줘. 나는 너를 누구보다 신용해 보이는 일이다」라고 말해 찬장에서 두꺼운 고서를 꺼내 왔다. 조금 본 것만으로 상당한 시대물이다. 책에는 조선어와 다채로운 그림이 삽입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유서있는 집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유서 있는?라고 그 때 의문이 생겼지만 후일 「그 집이 나의 숙부의 집이다」라고 알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훌륭한 구조로 초일급의 가옥으로 보였다. 후일 판명되었지만 그는 구조선왕과 아내는 아닌 다른 여성과의 아이였다. 어쨌든 그 고서를 보았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은 지구의 창생기부터 그 종말까지 써 있어 말하자면 예언서야」라고 설명했다. 서적명을 들었지만 몇 십년도 경과하고 있으므로 유감스럽지만 망각해 버렸다. 항을 넘겨 「현재의 전쟁도 기입되어 있어」 거기의 그림은 인물이 신체를 접어 구부리고 있다. 그 「여기에 기입되어 있다. 하늘로부터 마새가 춤추듯 내려가 인간의 살상을 계획하지만 그 때에는 몸을 접어 구부리고 땅에 엎드리든가 또는 구멍에 피난해라」 꼭 지금의 적비행기가 공격해 왔을 때의 피난이 써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는. 세계는? 「조선은 분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150년 후에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영웅이 출현해 조선의 통일이 완수해질 것이다. 꼭 그 때 일본 열도는 대분화해 대부분이 해저에 침하할 것이다. 그러나 7개의 작은 섬이 살아 남지만 인구도 국토도 근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정치력도 없어져 조선의 보호국이 될 것이다」 뭐! 150년 후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때 부터 약 60년 경과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90년 후다! 믿을 수 없다!라고 외치는 나. 「너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생각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책에 써 있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알았다. 그래서 세계는 어떻게 되는지? 「아르헨티나 브라질 러시아는 발전할 것이다」 중국은? 「이것은 분열할 것이다!」 적국인 미국은? 그리고 조선은? 이것은 들었을 것이었지만 이것 또 망각했다. 단지 기억에 있는 것은 「현재의 후진국이 생각치도 못한 발전을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미시마(三島)군 나라도 수명이 있지만 인간도 생물이니까 영구히는 살지 않아」 인간이 멸망하면 원숭이의 괴물이 전성기를 자랑한다. 점점 지구의 기온이 고열이 되어 지상의 생물은 전부 멸망. 따라서 바다 속의 생물이 전성기. 낙지의 괴물의 전성기도 있다. 이것은 각각 도해되어 있었다. 이번은 바다의 온도가 서서히 고열에 변화해 최종적으로는 해중 깊고 질척질척 한 해저에 조개의 전성기가 있다. 「그 때에는 지구의 창생기로 동일하고 지상은 물론 해저도 칠흑 같은 어둠과 같아져」 일단 설명은 종료했다. 「미시마(三島)군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멸망한다. 나는 조선인 너는 일본인이지만 그런 일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해 건강하고 언제까지나 친구로 있자!」 이러한 우호가1~2년 후에 파괴된다고는 신만이 알고 있던 것이었다.
1944년 11월 좀 더 엄한이 된다. 학우가 「미시마(三島)군. 박물관에 가 보자」. 전철을 환승 처음으로 평양 박물관에 입장했다. 다양한 진품도 많이 존재했지만 제일 놀란 것은 그 옛날 일본의 왜구(倭冠)와 조선수군과의 전투 장면이다. 일본인은 소인에게 그려 조선인은 그 몇배의 크기에 그려 상대를 위압하고 있는 장면. 나는 그림의 지식은 전혀 없지만 옛날은 이 필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대일본 제국에 의한 엄연한 통치가 있었던 시대였지만 다음의 현품과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의 교육과 역사관에서는"그 도요토미(豊臣)군이 한국 출병으로 원정 했지만 히데요시(秀吉) 사망으로 군사를 조선으로부터 철병 했다"라고 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에 써 있던 것은"조선수군에 공격받은 결과 퇴로를 끊긴 사무라이들은 구원도 절망이 되어 현지인 조선에 잔류했다. 전쟁은 종료. 위험하기 때문에 부락에는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먼 곳의 골짜기 등에서 오두막을 만들어 거기서 어떻게든 생활했다"라고 하는 설명. 때때로 일본에서 지참한 퉁소를 바람이 부는 대로 울린 것 같다. 그 퉁소가 눈앞에 몇 개나 고색창연하게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때의 충격. 열심히 견학했다. 일년도 경과하지 않고 같은 일이 또 재현한다고는 알지 못하고... 이 퉁소를 조선의 친구에게 설명하면 「뭐. 나의 집에도 몇개인가 있어」. 그러면 이라고 2개만 받았다. 교환으로 나의 보물. 무엇을 건네주었는지 지금은 망각하고 있지만 당시 조선의 골동품. 현재이면 중요 품목에 몇 점이나 추천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전쟁 전의 평양 박물관
드디어 종말의 1945년 1월. 미군 B29가 1기만 정찰의 목적으로 평양에도 왔다. 라디오가 외치는"적습 적습!"라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공복을 참고 극한으로 얼어붙은 방공호에 뛰어든다. 고도는 1만 미터나 있어 흰 연기의 항적운을 몇 개 토하면서 북부의 만주 방면으로 사라졌다. 그토록 전개하고 있던 일본기는 무능했던 것이다. 추격 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 일본인은 "곧 봐라"라고 생각했을 텐데 저것에 의해서 국위의 실추가 더욱 더 배증했을 것이다. 그것을 증거로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가옥을 순회하고 당시 불필요한 모닝이나 축음기등 마구 사고 있었다. 사서 어떻게 하는 거야?「아니 곧 있으면 평화가 온다」라고 회답. 무지한 것은 일본인 뿐이었던 것이다! 그때 부터 B29는 재삼 왔지만 폭탄 투하등 일절 실시되지 않았다. 일본측은 상투적인 말로 만주 방면에서 격파했다는 발표. 사실은 격파한 것은 아니고 반대로 격파되었다 라고 하는 소문이 난무했다. 군부는 항상"이번 전쟁은 가지는 나라와 가지지 않는 나라와의 전쟁이다. 그들은 타락 해 정신면이 제로다. 나에게는 야마토영혼이 있는"이라고 항상 국민을 고무 하고 있었지만...
저것은 1945년 2월. 이웃의 조선인 여러명 방문. 「 실은 부탁하러 왔습니다. 당신의 집의 변소 설치구가 저희들의 취사나 세탁을 하는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것이 불결하고 이전의 소유자에게 몇회나 이것을 간절히 원했지만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소유자가 바뀌었으므로 만약 이것을 대처해 주실 수 있으면 정말로 전원 기쁨」 그것을 들은 아버지는 「잘 알았다. 곧바로 설치구를 자택의 뜰로 변경할테니까」 그들 희색 만면. 무리했을 것이다. 진품의 조선떡을 사례에 지참했다. 혹한이었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간단하게 설치구를 이전했다. 같은 시기에 드물게 설탕의 배급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린조장으로 조선인에도 일본인에도 분배하지만 문제는 분배 방법. 일본인은 6 조선인은 4의 비율. 그 이유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은 설탕의 소비량이 근소이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와서는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하므로 일본인이나 조선인도 관계없다. 공평하게」라고 해 정말로 공평하게 분배했다. 게다가 전원의 눈앞에서. 그러나 잠시 후에 불평이 왔다. 일본인측으로부터 였지만 설탕은 이미 위안.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항이 종합 되고 잠시 후에 대난을 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 때는 몽상도 할 수 없었다.
중국의 건국자인 모(毛)주석은 최대중요항목의 3점을 항상 높게 내걸고 있었다. 그 항목과는 1.부녀자에게 난폭해선 안 되는 2.사람의 것을 훔쳐선 안 되는 3.빌린 물건은 돌려주어라! 옛 구세계의 시대에는 일상다반사에 횡행하고 있던 것 같다. 이것은 중국에 한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아시아 이외에 옮기면 미국에서는 도둑에 필적하는 것은 겁장이. 이것은 아마 서부극등에서 짐작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랍에 가면 훔치는 것보다 도둑맞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일반론이 있지만 정식으로는 엄벌이 기다리고 있어 형량에 의해서 손을 절단 하거나 한다. 유명한 벌로서 몸의 고기는 찢어져도 괜찮지만 피는 한 방울도 빼앗아선 안 되는 이라고 하는 유명한 재판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에서는 2.의 항목의 도둑이 항상 횡행하고 있었다. 어디의 가정도 취침전 반드시 자물쇠의 점검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 도난을 당했다. 이것은 일본인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어서 조선인도 동일했다. 어느 때 자택의 맞은 편에 사는 조선인이 화내 했다. 「어젯밤은 완전히 심한 눈에 있었다」왜? 「우리 집은 방이 좁아 게다가 방이 한 개 밖에 없기 때문에 전원이 같은 방에서 매일 저녁 취침하지만 거기에 도둑이 침입했다. 그도 다리를 밟지 않게 조심해 물색하고 있었지만 결국 취침중의 한 명의 아이의 다리를 밟아 버렸다」 당연히 아이는 큰 소리를 지른다. 도둑은 아마 필사적인 형상으로 도망해 버린 것 같다. 전혀 웃을 수 없는 사건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겨울은 특히 한기가 심했다. 어쨌든 동계의 상온은 마이너스 20도의 토지에서 실내의 기름이나 잉크등은 물론 완전하게 얼음이 되는 상태이다. 도로를 우차가 천천히 물건을 운반하지만 그 군침까지 얼어붙는다. 도로도 포함해 진짜 동토이다. 계절은 1945년 3월. 조선인의 절친한 친구인 전(全)이 방문해 말한 「여기로부터 조금 먼길 이지만 시골에 숙부가 있어. 거기에 가자. 식사의 걱정은 하지 말아줘. 다행히 나에게는 자전거가 있으므로 교대로 타고 가면 괜찮아」. 그러면 이라고 휴일을 이용해 나갔다. 실제 나는 시골에 별로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행선지들은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면서 시골의 산길을 통과한다. 1번 눈을 끈 것이 산재 하고 있는 옛 유적 같은 것. 예를 들어 민가의 돌담도 유적에 해당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것들은 옛날 사용된 것이다. 이 근처는 옛부터 전장이 되어 지나(支那)와의 싸움이나 일본군과도 여기가 격전장이 되어 러시아와도 교전한 장소다」. 나의 눈으로 보면 유적의 보물의 산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장소에서 아무 감동도 없는 것 같다. 조금 피로를 느꼈으므로 평탄한 묘지 부근에서 잠시 쉼. 아무리 젊은이라도 그 부드러운 길은 조금 괴로웠다. 조선 북부의 동계는 그 한기. 봄이 되면 표면은 건조하지만 표면아래는 별로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에 걸으면 길의 감촉이 매우 부드럽다. 꼭 시루떡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당분간 경과해 발밑의 작은 돌을 발길질로 한다. 그 순간 아래로부터 창칼풍으로 낡은 금전같은 것이 출현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나에게는 어떤 물건인가 불명하고 조선의 물건이나 중국의 물건인가 판단할 수 없었지만 낡은 금전같은 것은 사과상자 하나분 정도 발견했다. 상상하는데 전황 불리하고 퇴각할 때 파낼 것이었지만 도중 전사했는지 또 무엇인가의 사정으로 다시 올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에게 발견되는 운명이 되었던 것이라고 사고 할 수 밖에 없다. 생각치도 못한 진귀한 발견이지만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귀로에서 라고 생각해 한 줌만 포켓에 넣어 재차 보행을 개시한다. 그때 부터 1시간이나 지났을 것인가. 시계등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배시계. 공복이 되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면 아마 식사만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슴 속의 단지 하나의 희망이었다. 이름도 없는 작은 강을 통과하고 그가 외쳤다. 「저기야!」 바라보면 정당한 조선식이 당당한 대문의 가옥이다. 조선 가옥의 대부분은 대문을 개폐해 출입한다. 일본 가옥같이 간단하고 쉽게 출입하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그는 큰 소리로 나에게는 불명한 조선어로 외치고 문을 두드린다. 아마"아줌마 나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부로부터"이에"라고 하는 여성의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안으로부터 나온 것은 중년의 여성. 그의 숙모답다. 싱글벙글 하면서 초대한다. 선물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주저 하지만 그가 나의 손을 잡아 당긴다. 내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훌륭한 구조다. 온돌에는 자개 장롱(조개가 파묻혀 있는 장)이 당당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사발에 빛나는 듯한 흰 쌀밥이다. 거기에 나의 매우 좋아하는 김치. 백미의 밥 등 최근 본 적이 없다. 고개를 숙여 열중해서 먹는다. 이것은 정말로 극락의 일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일본어는 능숙하지 않지만 듣는 일본어는 대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일본어와 조선어의 혼합으로 「파비 たくさん 판보그라(밥을 많이 먹으세요)」. 감격과 너무나 맛있어서 때때로 가슴이 막힌다. 친구 그리고 우호란... 아무래도 열중하게 먹어 버렸다. 그리고 근처의 어머니들 50세 정도의 주인도 나왔다. 주인의 옷차림은 다른 사람들보다 깔끔하고 부부 두 사람 모두 품위있다. 이것은 양반사람(부자로 권력도 있어 당시로서는 안심할 수 있는 친일파). 다 먹은 사발에 탄 소량의 밥 거기에 더운 물을 넣어 준다. 이것은 조선식에서 일본의 오차즈케(お茶漬け)에 해당한다. 숙모 일어서 또 가져와 주었다. 이번은 조선떡. 일본의 떡과는 상위하고 전부 찹쌀은 아니고 미 떡으로 갸름한 떡. 둥글지만 평평하고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 팥한 떡. 이런 물건들은 암거래시장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 그것이 눈앞에 있다. 아아. 이것을 한입 가족에게 먹일 수 있으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그는 조카의 일본인이지만 특별한 친구이니까 이와 같이 없는 물건을 무리해 대우해 준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소년이라고 말해도 정말로 선물도 없어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고 심중 마음이 괴로왔다. 잠시 후 어머니들「지금의 전쟁은 이기는군요?」 그들도 불안했던 것이 틀림없다. 만약 일본이 패배하면 친일파라고 인정되어 상당히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일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일본은 절대로 이겨도 패배는 없는. 무엇보다도 신의 나라에서 일본은 패배했던 적이 없다. 괜찮아요! 이 말 하나로 마음 온화하게 되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실제 나 자신이 패배는 하지 않지만 승리에는 거리가 멀다 라고 생각한 것이 실정이었기 때문에...

찾아낸 낡은 전
만복이 되었으므로 진심으로 감사를 말해 그의 숙부의 집을 나왔다. 심했던 몸도 음식 하나로 도로를 경쾌하게 걷는다. 예의 오래된 돈도 간단하게 짊어지거나 자전거에 매달거나 하고 자택에 가지고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에게 오늘의 일을 보고했다. 부모님은 「너는 그 은혜를 반드시 결코 잊지 않고 언제의 날인가 평화로운 때가 도래하면 은혜를 돌려주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의 낡은 전. 평시라면 신문의 기사의 종의 하나나 되었을 텐데 전원이 상시 공복의 이러한 상태에서는 부모님은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현재 그 보물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 일본인의 나는 고난의 끝 귀국했지만 그 땅은 북한이므로 무사하게 생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다. 친일파였던 탓으로. 아무래도 그러한 생각이 든다. 일본이 패배하지 않으면 무사하고 평화롭게 일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국제 관계에 영향을 받으면 현재의 세계에서도 일반민이 심한 일이 된다. 무섭다!
1945년 4월 중순. 평양 교외의 추을대(秋乙台)에서 일본 육군의 관병식이 실시되었다. 당당히 믿음직한 보병의 큰 떼가 행진한다. 그러나 무기는? 그것이 외롭다고 할까 누구의 눈에서 봐도 빈약하다. 전차는4~5대. 게다가 소형. 대포?그것도 같은 것. 채색으로 지금은 무력화하고 있는 얼마 안되는 고사포. 그런데도 행진은 계속 된다. 곁에 있던 일본 부인 의심하도록 작은 소리로「형. 이것으로 괜찮을까」라고 속삭인다. 이것이 마지막에 본 대일본 제국 육군 부대의 모습이었다.
전황이 확대라고 하는 것보다 치열의 양상을 나타내 왔다. 이것은 부산(釜山)에서도 가끔 보여지고 있던 풍경이었지만 일본 본토로부터 수송선으로 무수한 병사등을 직접 조선의 현관문인 부산에 상륙시키고 미리 예정하고 있던 각 일본인 가옥에3~4인씩 숙박시키고 있었다. 물론 각 가정에서는 정중한 접대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은 소집병으로 병사들의 끝이 없는 이야기를 매일 밤 많이 들은 일을 생각해 낸다. 어느 일가의 어머니가 말하는데 「군인씨 부탁합니다. 나의 아들은 아직 아이입니다만 장래 반드시 도움이 될테니까」병사는 「지금부터에서는...」그것은 이구동성의 회답이었다. 이와 같이 접대되는 병사는 행복의 부류. 잠시 해 파병 증강을 위해 각 가정 만으로는 숙소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노면 전차의 레일을 베개로 해 취침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러한 광경이 증원 또 증원으로 전쟁 말기의 평양에서는 시가지에 충만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어졌던 것이다. 그 병사들은 패전이 되고 아마 대부분은 시베리아 연행이 되어 무사히 귀국한 병사는 어느 정도였던 일인가. 내가 다닌 학교교정에서 다수의 병사가 무엇인가 지하도같은 것을 파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몰랐다. 「반장전. 목욕탕은 좋습니까?」이제 와서는 그리운 그 드럼통 목욕탕이다. 「반장전. 더운 물 가감은 좋습니까?」 일등병이 외친 그 순간 공습경보의 기분 나쁜 사이렌이 울었다. 적습이라고 외치면서 군인들은 우왕좌왕. 학생 전원이 저 쪽의 상공을 보면 400미터 상공의 비행기는 일본의 수송기다. 현재의 젊은이는 차의 전 차종을 숙지하고 있지만 당시의 젊은이는 전비행기의 형태 등 적 아군을 불문하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군인씨. 저것은 일본기」라고 전원이 떠들었지만 퇴피의 명령. 억지로 방공호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뭐 이 비행기는 생산량이 근소였다고 기억에 있다. 패전 3개월전의 사건이었다.

옛 드럼통 목욕탕
5월에 들어가 평양 공회당에서 몇천명인가의 군중을 모아 미국 영국 격멸의 총궐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열변하는 것은 거의 조선인이었다. 그 때마다 군중으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 그리고 성원. 끝없는 열기의 회장이었다. 앞으로 100일이나 경과하지 않을 때 패전이 되지만 그런 기색은 느껴져 되었다. 활약한 그 사람들에게도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패전의 결과 우량한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일전해 친일파 그리고 대일 협력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하나 저것은 1945년 2월에 경성(京城)의 소년 비행병 모집 회장에 갔을 때의 일. 연령은14~15세 정도의 조선인 소년으로 그 때의 회화로 아마 조선 북부 출신자였던 것 같지만 소년 전차병에 응모해 왔지만 시험의 결과 불합격으로 판정된 것 같다. 「군인씨. 도와 주세요. 나는 나라를 나올 때에 부락 총출동으로 축하 받았다. 그것이 이 결과에서는 대면시키는 얼굴도 없어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소년. 마침내는 군인의 어깨를 잡아 대울음에 운다. 잡아진 군인도 완전히 곤혹하면서 위로하기 위해인가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들은 완전히 일본인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국도 오키나와(沖繩)가 함락. 적 미국은 본토 상륙과 동일하게 조선 남부에도 침공할지도 모르는이라고 판단의 결과 비행장의 원내호(援耐壕)건설을 위해 평양 비행장에는 최대한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실제는 전방의 적보다 반대의 북부 후방의 소련에 공격받는 결과가 되었지만. 현재와 같은 공업력을 이용하면 아주 간단하게 완성하지만 당시는 어쩔 수 없이 삽으로 인력 작전. 개미같이 모여도 한 개를 완성하는데 일주일간은 걸린 기억이 있다. 무엇을 먹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군대식의 일부가 지급된 희미한 기억이 있다. 물론 조선인도 함께 되어 서로 완성을 서로 경쟁했다.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에 대해서. 통설에는 소련은 불법으로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런데 각 정보지를 검색한 결과 상당히 다른 점이 있었다. 확실한 일설에 의하면 소련은 당초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의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은 대일전에서 본토 상륙 작전까지 감행 하면 100만의 희생이 생기므로 그 이전에 소련에 이 전쟁의 일부를 담당하게 해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한다. 그 대상으로 해서 몫을 분할한다고 하는 조건으로 당시의 투르만(Toruman) 대통령이 소련에 제안한 것 같지만 소련의 스탈린(Stalin)은 만약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했다면 인민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해 일축 되어 버린 것 같다. 미국측은 이것에 경악 해 3회도 특사를 파견한 결과 결국 소련이 승낙. 그 몫의 조건으로서 미국측이 제안한 내용은 만주의 대련(大連) 여순(旅順)과 남만주철도(南満州鉄道)의 권리와 중국 신강성(新彊省)을 소련의 세력범위에 넣는다. 또 가라후토(樺太)의 남부와 쿠릴 열도 제도(千島列島諸島)는 물론 소련에게 준다 라고 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미국측의 의도에서는 지금에 말하는 북방 영토(北方領土)의 경계선을 일부러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장래 일소(日ソ)가 공동 보조를 취하면 미국이 불리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상상이 강하다. 그렇게 해서 이 안에 합의한 순간 스탈린은 전례에 없는 강한 어조로 침략자 일본이라고 지명해 모스크바(Moscow)에서 연설해 그리고 대일의 선전의 포고를 해 그것과 동시에 일본병 포로를 수용하기 급증의 포로용의 숙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세계는 정세가 항상 격변 하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소련은 당초의 희망 전부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것이 역사이며 향후도 동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