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공의 뱃 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이 노래는 일본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옛 부터 불리고 있는 명곡이다. 이 노래의 발상지가 목포(木浦)이다.
목포(木浦)는 정말로 온난의 땅이다. 과거 신의주(新義州)에서 부산(釜山)으로 온 것은 확실히 10월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출발할 때에는 벌써 북풍이 조금 춥게 느껴졌지만 부산에 도착하자 아직 늦더위가 있어 모기도 윙윙. 같은 조선인데 너무 온도가 상위해 놀란 기억이 있었지만 목포는 더 이상에 온난의 땅에서 2월 중순에는 새싹이 서서히 나오는 토지다. 단지 아까운 일은 봄바람이 강한 일이었다.
목포(木浦)는 김의 산지에서 한때는 아사쿠사김(浅草海苔)로서 유명했던 시기도 있었다. 현재는 또 다시 부활의 조짐이 보여 온 것 같다. 그리고 이것도 잊을 수 없는 음식이 단무지. 일본인에 있어서는 필수품의 단무지다. 그 맛은 잊을 수 없다. 마치 배의 감각이 있다. 역시 토양이 매우 풍부한 토지일 것이다. 여기 만이 아니다. 85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는 제주도(済州島)까지 동일한 토양인것 같다. 조선에서는 그 나라의 대표음식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김치의 주요 재료인 배추가 재배되지 않았지만 운명은 정말로 모른다. 한일합방의 때 일본 군벌이 병합 반대였다 그 왕비의 어머니를 암살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은 상위한 것 같다. 실제로 암살을 한 것은 조선인이다. 그 때문에 보복을 무서워하고 일본에 도망쳐 일본 부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만들었다. 그 아이가 우수하고 도쿄 농대(東京農大)에 입학. 그 연구의 하나로서 김치의 개량 품종을 만들어 냈다. 그 때의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특별 대우로 그를 한국에 초빙 했다. 그는 일본 태생이므로 조선어는 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의 지도에 의해 현재 일본에서도 애호가가 많은 그 김치가 완성했다. 지금은 그 공로가 평가되어 동상이 서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목포는 농사에서는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이 되어 있다. 그리고 낚싯밥에 사용하는 작은 새우의 대산지. 썰물때 해수에 다리를 넣으면 다리에 무수한 작은 새우가 접한다.
주변에는 다수의 작은 섬이 존재해 거기에 간조와 만조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배가 목포항에 입항하는 것은 고생이 수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것은 확실히 1942년의 봄 아직 일본이 패전의 괴로움을 쬐지 않는 시기 겁없게도 미국 잠수함이 만 깊게 잠입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무선 관계로 재빠르게 탐지. 큰 소란이 되어 부근의 해군무관을 통해서 대처한 것 같다. 3척의 구축함이 출동 4일 정도 지나 추적해 아득한 대련(大連)바다에서 격침한 것 같다. 비교하면 일본군 보다 미군이 모험심이 풍부하고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신문지상에”오키나와(沖繩)의 무인도에 일시적으로이지만 상륙한 기색이 있으므로 방첩에는 충분히 조심하세요”와의 전달도 있었다.

1942년 목포 무선국장실
목포(木浦) 중심부에서 자택까지 약 4킬로미터 있었다. 거기로부터 반에 도달하는데 호남선(湖南線)의 건널목이 있어 그것을 중심으로 한 도로 양측으로 이른바 암거래가게가 즐비하게. 점포 같은 건 없다. 단지 지면에 물건을 진열했을 뿐의 가게이다. 그 물건들은 당시 식료품 통제로 입수할 수 없었던 조선떡. 일본식과는 달라 표면에 떡이 첨부되어 있는 것만으로 단맛이 없다. 이것은 원래 단맛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판매자는 조선의 어머니들. 이 시기 우리도 좀처럼 입에 넣어지지 않는 것을 여기까지 진열하는데는 상당한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연일과 같이 곁눈질로 지나갈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인간 자존심이 있다.특히 우리 일본인은 썩어도 준치(腐っても鯛)라고 하는 것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당시의 일본인은 그런 일 할 수 없고 할 리도 없었다. 그래서 주된 단속은 그들 조선인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생활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이 단속에 의해 몰수가 되면 일가의 경제가 파탄할지도 모른다. 몇명의 순경에 의해 체포. 몰수되는 운명이 온다. 우리 일본인은 방관 할 수 밖에 없다. 안에는 아는 사이도 있다. 노성과 아이고가 소용돌이친다. 큰 소리로 울부짖는 어머니도 있다. 그러나 체포. 물건은 몰수. 그들도 경제 위반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이런 일도 반일 사상의 한 요인이 되어 있다. 이제 싫다. 저런 사건은!.
옛날 니가타현(新潟県)의 대지주노래에도 있던”혼마(本間)님에게는 이길 수 없지만 적어도 되고 싶은 영주에”와 같이 조선인에서도 실업가라든지 부자 그리고 양반이 다수 존재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치 관련으로....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일본 정부와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유리. 그들의 아들들은 도쿄(東京)의 일류 대학 혹은 유럽 유학. 게다가 왕복은 비행기로. 당신의 지인으로 당시 이런 유학한 사람은 있습니까? 당시의 우리 서민에서는 몽상 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장소에 할아버지로 김(金)씨라고 하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유행의 인견 직물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매우 품위있는 사람으로 긴 백발의 자를 어루만지면서 빈번히 자택에 방문하고 있었다. 자택의 뒤는 목포 상업학교로 「거기에 손자가 신세를 지고 있다」라고 언제나 말했지만 실은 그 학생의 이름은"김대중(金大中)". 전 한국 대통령의 학생시절의 일이다. 그는 조선인은 원부터 일본인의 사이에서도 신동이라고 소문되고 있었다. 단순한 수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당시 확실히 상업학교의 3학년으로 거기에 관련되는 화제도 있었지만 지금은 망각해 버렸던 것이 유감. 이 학교의 학생은 대부분이 조선인 학생이었으므로 나는 싫어 해 입학하지 않고 4킬로미터나 떨어진 중학교에 입학했다. 좋은가 나쁜가 사람의 운명은 이런 곳에서도 교차한다. 당시의 조선에서는 도처에 교육의 시설을 건설하고 있었다. 최초의 항으로 조선은 암석의 산림이 다수라고 말했다. 지금은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당시는 특히 여름이 되면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 가뭄에 골치를 썩였다. 온돌 등의 연료로 곧바로 산림을 벌채하므로 산림은 보수 능력이 극단적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관계로 강우가 있으면 곧바로 홍수 그리고 역이라면 물부족의 현상이 재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절수를 위해 수도가 정지. 2~3일 계속 되면 급수 장소에 물통의 행렬. 그 물통의 차례로 싸움이 일어난다. 우리 일본인도 같다. 거기에 비교해 우리 일본 본토는 그 점에서도 풍족하다. 오랫만에 호우가 내렸다. 甲씨 좋았지요. 나의 곳은 수원이 풍부했지만 沈씨는 심한 눈에 있던 것 같다.

1942년4월17일 목포 중학교 입학식.
조선인의 이름으로 김(金)씨 이(李)씨는 귀에 익은 이름이다. 서울의 남산(南山)으로부터 돌을 던지면 누군가의 김씨의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는 일화마저 있어 김씨의 이름은 무한하게 많다. 그러나 조선 민족에게도 우리가 전혀 들었던 적이 없는 이름도 있다. 이러한 성은 삼국시대에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므로 중국의 성명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해진다. 또 본관(本貫)이라고 해 자신의 선조의 발상지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에는"이름은 김(金)으로 본관은 목포(木浦)입니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따라 동성에서도 선조가 동일한가 상위한지를 식별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과는 상이해 비록 결혼해도 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옛날 일본에서도 있던 것 같다. 또 성의 발상지가 같으면 결혼은 법률에 의해서 금지되고 있다. 일본인 부부가 사촌형제라면"형제의 결혼이다"라고 잘 웃어진 것이다.
당시 내선일체(内鮮一体 : 글자 그대로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어)라고 항상 주장되고 있었지만 민족이 다르면 습관 그리고 가치관까지 다르다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내 아이들의 가장 모험심을 돋우는 놀이라 해도 일본인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위험한 놀이가 있었다. 그 하나로서 때때로 볼 수 있던 것은 열차가 아득히 저 쪽에서 맹진해 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의 레일의 폭은 좁지만 해외의 레일은 상당히 폭이 있다. 그 열차가 접근해 온다. 그들은 일제히 침목과 침목의 사이에 몸을 숙인다. 열차는 그들의 얼굴 위를 순간적으로 통과한다. 모두 일제히 일어서 미소 짓는다. 단지 이만큼이다! 전원 연령적으로 보면 초등 학생의3~4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일까?
목포(木浦) 중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목포에 이사해 와 몇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목포 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여기의 초등학교는 당시 산수 초등학교(山手小学校)라고 칭해 일본인 전용의 초등학교에서 재적 아동수는 400명~500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현존 하고 있지 않지만 초등학교 위에 2년 과정의 고등과가 있어 그러한 학생은 비진학조가 대부분이었다. 그 조에 배속 장교가 배치되어 있었다. 주로 군사 교육에 임하고 있었다. 지위는 육군 소위. 그런데 이 소위. 이면의 해설에서는"금출소위전". 글자 그대로 돈으로 산 소위와 속삭여지고 있었지만 진위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소위가 배속되어 있던 그 해의 12월. 정확하게 1941년 12월 8일. 결국 영미에 대해서 선전포고. 개전과 동시에 차례차례 전과가 올라 어린 생각에도 흥분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귀가 도중의 풍경은 그것들에 무연의 방목적 풍경이 전개하고 있었다. 그 조선 엿매도. 큰 가위를 카치 카치 라고 울린다. 조선의 독특한 소리가 난다. 일본인인 나에게는 지금도 그 풍경이 기쁜 듯한 그리운 듯한 혹은 슬픈 듯한 추억으로서 수십년 경과한 현시점에서도 아득히 되는 고향의 원점의 일부로서 패전국민의 슬픈 이야기와 함께 혼입해 있다.
나는 지금에 말하는 전근족의 가족의 일원이었으므로 확실히 시야는 광범위했지만. 그 사람들은 어디에 갔는가! 어디에 사라져 버렸는가!

1943년 전황 격렬한 무렵의 목포 중학교
목포 중학교(木浦中学校)부터 자택까지의 귀로의 도중에 작은 산을 잘라 나눈 장소가 있어 그 옆에 지금에 말하는 작은 찻집이 존재해 나카야마(中山)라고 하는 여성이 경영해 거기를 지나면 조선인 전문의 초등학교에서 산정보통 초등학교(山亭普通小学校)가 존재하고 있었다. 꽤 큰 규모의 초등학교였던 기억이 있지만 별로 교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 밑바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낯가림하지 않는 성격이므로 가끔 거기의 학생과 회화를 했다. 「일본에 역사가 있어 우리에게도 역사가 있다.이 왕조(李王朝)의 시대 이전부터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하게 있어 일본의 황족인 누구누구는 우리 나라의 왕족에게 신부로 왔다!」 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우리 일본인은 그런 일 몰라. 「뭐 들어 줘. 그것이 몇번이나 있어 당시의 우리 나라는 그것을 기념하고 축일에도 하고 있었지만 일본에 병합 하고 나서 그러한 건은 모두 역사에 없다」 그 이야기를 할인해도 무엇인가는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대답의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망각해 버렸지만 당시를 신중하게 관찰하면 뭐라고 천년 이전 백제시대의 역사도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본인도 아이의 시대에 교육된 아득히 옛 야마토 시대의 역사관이 머릿속에 잔류하고 있듯이 그들도 당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은 옛날 이러했다라고 말하는 역사관은 우리에게는 있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의 역사관이 당연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 상대의 심정에 짐작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일본인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패전 후 교류가 전혀 무에 동일한 사람들도 다대하게 있다. 본래 이러한 일이 국제 교류의 원점으로도 되어 있을 것이지만.
도청기로 유명한 사례라고 하면 상당 이전이지만 미국 대통령이 이 건으로 사직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워터 사건이다. 이것은 남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신의주(新義州)에서 부산(釜山)의 무선 관사에 전근했을 때의 일이다. 그것까지 생활하고 있던 전임자의 관사에 입주해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상인방의 뒤편에 손댄 순간. 「무엇이다 이것은?」 거기로부터 끌어낸 것은 전화선. 그것을 더듬어 가면 무선국의 사무실의 조금 눈에 띄기 어려운 장소에 도청기가 설치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관리(공무원)에게는 노동조합과 같은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군대와 같고 상관의 생명은 일본왕의 명령이라고 칭하고 있었던 시대다. 과거의 대일본 제국의 행정은 전부는 없지만 관리자 사이에 은밀하게 통하고 있던 사람들도 실재하고 있던 것 같다.
통학 도중. 조석 마차가 상당수 왕래하지만 그 중 몇명의 차부가 일본인을 보면 혐오의 표정으로 고삐를 회전시켜 당장 달려들까 라고 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모두 몸에 결함이 있었다. 전해 듣는데 그 사람들은 조선3.1"만세 사건". 일본의 동화 정책과 일본대자본의 진출로 조선 일반 대중은 압박받아 1919년 경성(京城)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을 발표해 그것이 조선 전 국토에 퍼졌다. 혁명적 요소를 포함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강경한 탄압으로 거기에 임했다. 고삐를 회전시킨 그 남자들은 그 때의 생존자였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부터 20년 남짓 밖에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 이러한 사람들은 각지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공포감이 있었지만 그 3.1 만세 사건을 당시 가장 기분을 허락할 수 있는 친구의 조선인 학우에게 살그머니 물어 보았다. 그의 이름은 만일 일본명으로 타나카(田中)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데는. 「이렇게 되었던 것도 우리 조선인이 자신만 중심으로 지금도 그것이 있다. 거기에 비교해 일본인은 나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식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가정 중심으로 게다가 머리의 한쪽 구석에는 국가가 있다. 우리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이 살고 있는 부락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예를 들면 부락의 노인은 소중히 하지만 모르는 부락의 노인에게는 이 노인 나이만 먹고 쓸모 없는 라고 하는 식으로 곧바로 고함친다!」 그렇게 말해지면 그런 풍경은 몇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만세 사건에 대해서는 회답이 없었다. 이것은 암묵으로 이 같기 때문에 조선은 이렇게 되었던 것이다 라고 아마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본심은 결국 말하지 않았다.
조선의 근대사는 신미사건(辛未事件 1871) 미국과의 포격 사건(1871) 미국.프랑스의 공동 침략 사건(1875) 일본 조선 책략 사건(1881) 주일 청나라 외교관 사건(1881)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일본,청나라가 장래 전개하는 외교 정책을 논한 책을 은밀하게 수입 배포해서 발각된 사건(1884) 조선 내부의 정변(1882) 일본은 친일파와 손을 잡아 명성황후(明成皇后 : 그녀는 국왕의 어머니로 친로파)를 살해했지만 전항에도 기입한 것처럼 사실은 조선인이다. 이와 같이 약 10년에 중대사건 투성이에서는 도저히가 아니지만 국가로서 유지할 수 없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 의견으로 출신지 중심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국에서도 19세기부터 20세기 처음에 걸쳐 중국, 일본, 러시아의 외교적 압박을 받아 그 밸런스를 잃어 나라를 한때 잃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아득히 옛 1340년전 야마토군이 괴멸 한 관계로부터 바로 최근까지 부산 등의 사람들과는 결혼 등은 일절 성립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다. 현재의 한국도 장래 북한과 화해해도 같은 것의 재발이 없다고 하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삼자인 일본인에게는 이 미묘한 감정은 모르는 것이다.

옛 목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