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가을날 급속히 석양이 가라앉는 그 순간 거기에는 거대한 붉은 태양이 출현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진한 주홍이라고 표현할까, 지평선의 저 편으로 가라앉아 간다. 장대하다. 장엄이다. 여기는 일본 시대의 조선, 평안 남도, 진남포(鎮南浦)(현재의 북한 남포시). 옛날"붉은 석양의 만주에"라고 불렸던 시대가 있었지만 여기에도 완전히 동일한 황혼이 있었던 것이다. 소리를 크게 해 무엇인가 외치고 싶다. 혹은 반대로 침묵할까. 침묵하고 낙양을 바라볼까. 이 정서는 서양 동양 관계없이 이야기 혹은 서술시가 되어 있지만 그 가장 현저한 예로서 그 폴란드 공화국의 국기의 하반부에 그것이 선명히 표시되고 있는 것은 일부의 사람들에게 주지되고 있는 일이다.
당시로서는 참신한 통칭 버스트산 이라고 말해진 작은 언덕에 서있는 교회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무렵, 석양의 기색 헤아려 보금자리를 찾아 먼 송림에서 조선 까마귀의 무리가 울음 소리를 올리면서 사라져 간다. 이 글을 보면 소위 유토피아를 자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1934년 전후는 만주국 성립, 그리고 만주국과 국경을 접하는 조선 특히 북부에서는 후방 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육군 부대의 훈련이 있었다. 진남포(鎮南浦)는 사단이 있는 평양으로부터 약30킬로미터의 황해에 접한 항구도시. 간만의 차이는 10미터 가깝게 있어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양상이다.

진남포
대단한 마을은 아니었지만 정보원의 무선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중심으로 가끔 주로 육군 보병 부대의 연습이 전개되었다. 그 연습도 야간을 상정한 훈련한 것 같아서 낮에 무장도 늠름하게 착검상태로 전원 검은 안경을 써서 실전과 같은 훈련이다. 때때로 소형 전차도 출동한다. 도로에는 기관총이 딸린 사이드카도 질주 한다. 저런 광경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고 또 있으면 대단한 사태가 된다. 이러한 병사는 평양으로부터 파병된 병사였던 것 같다. 지금은 사어화하고 있지만 충군 애국을 주입해져 그 중요한 기둥의 하나로서 유명했던 "폭탄3용사". 이것은 세 명1조로 폭탄을 안아 적군 주요부에 돌입하고, 자신들 몸은 폭탄과 함께 산화하여 아군을 위해 진로를 열었다. 이 이야기는 국정교과서에도 게재되었다. 소위 묘행진(廟行鎭)의 격전의 모양으로 당시의 일본인이라면 상식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였기 때문에 예를 들어 빈농 출신자라도 일단 군복을 착용하면 제국 군인으로서 존경의 시선으로 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은 상시 있던 것이 아니고 평소에 표면에서는 평화 그 자체로 항구에는 외국선의 출입도 빈번했다. 그때부터 반세기도 되지 않은 시점, 현재와 같은 폐쇄적으로 외국인에 있어서는 입항은 커녕 시가지를 볼 수 있는 것 조차도 곤란하게 되는 일을 누가 상상했을 것인가. 당시 진남포(鎮南浦)에는 수천명의 일본인이 주거 하고 있던 것 같다. 거기에 따라 상인들도 다수의 일본인 손님을 가져 왕래도 빈번했다.
일본 본토와 다른 것은 그 상인들이 외국풍에 익숙했던 일이다. 러시아인 터키인 중국인(당시는 "지나인" 또는 "니이얀"라고 불리고 있던) 거기에 조선인, 러시아인은 공산혁명을 피한 방랑의 백성으로 거의 백계 러일 전쟁 당시 종군하여 일본군과 교전한 한 때의 병사들도 존재하고 있어 이야기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슬픈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인 「pocchan tenho tenho arune(도련님 훌륭하다)」 조선인 「tandanni chon chokoman saramiyo(정말로 좋은 아이구나)」 러시아인 「o-chinharo-shi ma-ringe(몹시 좋은 아이구나)」. 이런 식으로 각국어가 교차한다. 이것이 진짜 국제색이다. 물론 일본인의 상인도 다수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지금은 시대극으로 밖에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포목전을 예를 들면, 상투적이지만 점포 앞에는 심부름꾼 꼬마가 있고, 안쪽에는 가게의 주인이 당당히 자리 잡고 앉는 식이다. 동심에도 상당히 번성하고 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같은 장사라고 해도 다른 민족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으로서 일본 상법은 어디까지나 점포가 중심의 판매 방법. 다른 민족은 지금에 말하는 외근 판매가 주류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고 있던 것은 그 유명한 화교 상법. 중국 상법이다. 사장실이라고 말하면 중요 서류가 정연하게 줄서 풍격 있는 방의 광경을 떠올리지만 화교는 다르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 책상과 의자만. 계약서 있으려면 있지만, 별로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로 거래는 언약만. 어디까지나 신뢰가 전제의 상법이다. 잡화등의 소매업 등은 또 얘기가 다르고 상당한 점포의 주인이라도 오전 중은 앞장 서 고객 순회이다. 당시는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각 상품의 견본을 가방에 넣어 자전거로 순회. 옛날에 일본에서도 볼 수 있던 그 유명한 후지의 약품 판매의 풍경으로 그 나누어진 가방 속은 응축된 식품, 잡화 그 외 다양하다. 고객의 아이들에게의 서비스의 물건도 가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어도 원숙해진 것이다. 주문을 받는다. 그리고 거기에 끝나지 않고「부인 무엇인가 곤란한 일은 없습니까?」. 요망이 있으면 본업 이외의 그야말로 생선의 배달 등 뭐든지 맡는다. 병원에 약을 수취하러도 간다. 그리고 전화 연락. 그것을 할 수 없으면 사용인에게 알려 곧바로 배달. 이익도 반환의 상법.때때로 부인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큰 생선을 서비스. 이것으로 번성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중국 상법이다.

1929년 진남포에서
어릴 때에 본 진남포(鎮南浦)의 풍경이 그 후도 머리의 한쪽 구석에 남아 다시 한번 그 풍경을 보고 싶은, 그때 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패전 직전의 1945년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 소망을 이룰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진남포(鎮南浦)는 당시 조선에서도 유명한 사과의 산지에서 그 구입을 위해 갈 수 있었다. 물론 기차의 표는 일주일전에 준비. 극단적인 혼잡에 비비어져서 겨우 진남포(鎮南浦)에 도착했다. 10년 전에 유아가 본 풍경과 10년후 성장한 소년의 눈에서는 상당히 차이가 있던 것 같지만 걷으로는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 최대의 차이는 유아가 본 높은 산이 10년 후의 소년의 눈에는 작은 언덕으로 보이거나 아득한 저 쪽의 해안선이 바로 목전이기도 했다. 그리워서 해안에 간다. 인파 속에서 천천히 걸어 가면 거기에는 쌓은 대합에게 가솔린을 뿌려 점화해 굽고 있는 광경이었다. 나도 소량 구입. 뜨거움을 불어 한입. 입에 들어가면 소박하기는 하지만 사치스러운 맛이었다. 이 지방에서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조리 방법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사과도 당시로서는 좋은 크기. 오랜만의 사과와의 대면에 열중해서 덥석 문다. 벌써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혹한의 폐쇄적인 북한을 열거 하기에는 끝이 없고 더 이상 다시 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역시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의 고향의 일부가 되어 있다. 글 중에는 때때로「고향」의 자취가 나오지만 이것은 나에게 한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1935년 신의주의 자택뜰에서.
압록강 대교(鴨緑江大橋). 신의주(新義州)에서 중국 만주(満州)에 걸쳐 있는 대교. 약1.5킬로미터. 일본 시대에 시공. 이 강은 뱅어가 생식해 한때는 명물이 되어 기차 도시락으로 유명했던 시대도 있어 그것과 동시에 압록강절(鴨緑江節)이 불려졌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 대교는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지금은 복구되고 있는 것 같다.

신의주(新義州) 측에는 일본군 경비병 만주(満洲) 측에는 만주군이 경비해 물론 세관도 존재해 밀수 납치를 조사하고 있었다. 납치의 문제는 우리 일본인에 있어서 인권 이전의 문제로 신문지상에 연일 기재되어 있지만 이것은 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지금 시작된 문제는 아닌 것이다. 국경의 거리 신의주(新義州)에서도 야간 외출은 극단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납치자는 마적 비적 등 여러가지 있었지만 주로 몸값이 제일의 요구 목적이었던 것 같다. 납치 투석 박치기 그렇게 해서 남자의 급소를 찬다. 그들의 국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가슴에 상대의 머리가 뛰어들어 온다. 그리고 급소 차는 것. 이것은 견딜 수 없다. 지면에 눕고 코피를 흘린다. 조선에서도 남부의 납치는 별로 듣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일은 아직도 치안이 안정되지 않는 구만주(旧満洲) 방면에서도 현지의 주민들의 염려이기도 해 만주인이 중심이 되어 타지방의 중국인도 찬동 해 독립한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이라고 하는 기운이 생겼을 때 이것에 편승 한 관동군이 억지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는 이야기를 만주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일본은 급한 것 지나치다. 만만디(천천히) 영국식에」라고.

일본군과 만주군
압록강(鴨緑江)의 명물이라고 하면 뗏목이다. 재목 운송에 이용된 거대한 뗏목이면 뗏목 위에 주거용의 오두막도 있어, 밭 있어, 가축도 사육하면서 강놀이 이다. 이것도 평시의 기후라면 무사 평온이지만 장마가 되면 흐름은 증수. 급류가 되어 때에는 뗏목위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위기가 방문하기도 한다. 대안에서 보면 굉장한 스피드로 떠내려가. 도움을 요구하고 손을 흔들지만 구조할 방법이 없다. 지금과 같이 헬리콥터도 없고 그러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던 것 틀림없다. 그러나 평소에 뗏목이 느긋한 모습을 때때로 보여, 거기에 더해 관광 명물의 프로펠라선이 굉음을 세워 강의 표면을 미끄러지도록 질주 한다. 겨울철이 되면 강은 전면 빙결, 운전자 교대의 대형 썰매가 주역으로4~5명을 실어 서투른 자동차 같은 수준의 스피드로 주행한다. 대륙의 정서이다.

압록강의 이카다
때때로 부모 에 이끌려 건너편의 만주제국(満州帝国) 안동시(安東市)에 행락에 갔다. 압록강(鴨緑江)의 철교를 기차에서 통과한다. 아무리 일본의 세력권이라고 말해도 다리의 조선 측에는 총검도 늠름한 일본병이 감시하고 있어 차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간단한 세관 검사가 있어 반대의 안동역에 도착하면 일본 만주 양군의 병사가 감시하고 있다. 유격대, 마적등의 수상한 사람의 출입을 감시하고 있다.조선의 복장은 흰색 일색이지만 도착한 안동역은 검은색 일색. 민족과 나라가 다르면 일목 요연하다. 그렇게 해서 공기와 냄새가 중국 독특하게 느껴진다. 마치요(マーチヨ)를 타면 아이면서 임금님 기분이다. 목에 붙인 방울의 소리도 그런 기분을 배증한다. 소란을 다하는 쇼톨거리(통칭 도둑 시장). 없는 물건이 없다. 고급품의 귀금속으로부터 시작해 골동품 구두의 한쪽, 도둑질된 물건들. 도둑 맞으면 반드시 거기에 있는 이라고 하는 속설이 있었을 정도다. 안에는 터무니 없는 진품도 때때로 발견된 것 같다. 지금 이것들을 운 좋게 보존하고 있으면 이라고 생각하지만 유감스럽지만 있을 리는 없다. 아이인 나의 눈에 달라 붙은 것은 천칭 바구니. 양쪽에 아이를 넣어 팔고 있던 것 이다. 지금까지 본 청색 군복차림의 만주국군의 경쾌한 모습이 이 아이 매도와 중복 해 왠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이 일은 일본 패전 후, 일본인의 아이도 같은 일을 당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안동(安東)에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잘 데려 가 주었지만 그 귀가는 열차 뿐만이 아니었다. 동계에는 그 완전 빙결한 압록강을 대형 썰매에 가족 전원 승차. 썰매의 크기는 아마 다다미 2장분 정도 있었다고 희미하게 기억이 있다. 썰매를 운전하는 것은 중국인 한명만. 그 스피드는 서투른 자동차 같은 수준의 속도. 얼음이 깎아지는 소리가 울린다. 갈 때는 간단한 세관 검사가 있었지만 이 썰매를 탔을 때에 세관 검사를 하신 기억은 전혀 없다. 어쨌든 당시는 대일본 제국 시대였으므로 형식적인 검사로 문제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출발한 안동(安東)은 황혼. 그 등불이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신의주(新義州)의 등불이 가깝게 된다. 그 당시에는 안동(安東)에도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안동(安東)은 만주국. 한편 신의주(新義州)는 조선이라고 해도 일본 영토. 그 때문에 모든 물가에도 가격의 차이가 있었지만 신의주(新義州)측이 물가가 낮은 경우 지금에 말하는 쇼핑 투어가 있던 것 같다. 그런 일을 간단하게 할 수 있던 이유는 대일본 제국의 권력이 강대했던 탓도 있었던 것이다. 그 극단적인 예로서 만주국의 통화는 조선에서는 유통할 수 없지만 조선측의 지폐는 당연 만주국에서 유통할 수 있어 일본인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엄한도 3월 하순부터 4월이 되어 서서히 대망의 봄이 소리없이 다가와 강은 유빙 그리고 본래의 흐름이 되어 명물의 뗏목도 부활. 그리고 프로펠라선도 굉음을 세워 세워 질주 한다. 이 프로펠라선, 압록강의 수심이 극단적으로 얕은 장소가 있으므로 필요를 느껴 이 배를 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상 최첨단에 장착되고 있는 프로펠라가 정기적으로 굉음을 울려 주행한다. 그때 부터 수십년 현재는 엄중한 국경선이 펼쳐져 있지만 저것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압록강의 프로펠라선
자택은 도청 건물을 통과한 바로 부근. 당시 새롭게 건설한 신의주 신사(新義州神社)가 있어 그 근처 「쇼와 9년」이라고 페인트로 선명히 기재된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 부터 약10년 후에 침략자의 상징으로서 파괴해지는 운명이 된다고는... 여담은 접어두어 그 신사를 통과하면 통로에는 지금에 말하는 요정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다. 길흉을 따져 가게의 문전에는 양쪽 모두에 소금이 산같이 놓여져 있다. 뿌리는 물까지 베풀어 부정탄 손님에 대해서는 방심하지 않게 하고 있다. 아무도 없을 때에 그 소금의 산을 차버려 도망친다. 지금에 말하는 악동이었지만 몇회 인가 하고 있으면 결국 악행이 발견되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 다음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그것을 멈춘 것은 아니고 악행의 장소를 정규의 포플러 가로수의 통로로 변경했던 것이다. 하교시 그 포플러의 줄기에 몇개인가 작은 혹이 있으므로 그것을 벗기면 안에는 빨강이든지 청색의 고구마벌레가 있다. 그것을 수확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초등학교3년생의 나도 때때로 현실의 어른의 세계에 직면한다. 어느 날 아마 하교중의 사건이었다. 소달구지가 온몸이 묶여 있는 사람들을 태워 연행 중으로, 조선인일까 중국인일까 확실하지 않지만 전원 상당히 음주한 것 같아서 안에는 취해 널 부러져 있는 사람도 있다. 연행하는 순경도 무언, 연행되는 사람도 무언. 구경꾼들의 소곤거림으로 「저것은 비적으로 이번 겨우 잡혔다」라고 들려 온다 . 그리고 지금부터 처형장에 데리고 가져서 처형되는 것이라고. 어째서 살해당하는지? 어린 생각으로 소박한 질문을 했다. 「그 사람들은 악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적이나 비적인가 어느 쪽인가 다」. 당시 유격대라고 반일 게릴라 등의 말은 별로 귀에 들려오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일본 당국에 사정이 좋지 않은 관계로 한결같게 마적이라든지 비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해지면 학교 정면의 입구에 당시로서는 매우 모던한 아치 의 저택이 있었다. 스페인 혹은 남유럽 풍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 아치 입구의 받침대 위에 두개골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거기의 주인은 손님이 오면 별도의 두개골을 테이블에 두어 열린 입 사이에 만두를 두어"드세요" 라고 말해 깜짝 놀란 손님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는 이야기였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사망자에게 채찍 치는"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런 일이 지금도 최악의 기억으로서 뇌리에 남아 있다. 이것이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천신 모두 용서되지 않는 행위로 반일의 상징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인 여기에 있어」
1934년경 반일 게릴라가 조선 북부 아마 회령(会寧) 부근에서 일본 경찰의 허를 찔러 일시 마을의 요충지를 점거했던 적이 있었다. 수비의 일본 경찰은 전멸 직전에 구원의 수비대에게 구출되었다. 이것은 영화로도 되어 일본인은 어떠한 사태가 생겨도 대화영혼은 건재하다고 선전되었다.
회령(会寧). 여기는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비참한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옛날에는 그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무사들이 여기까지 침공해 때의 조선 왕자 2명을 잡아 참사 한 사례가 있다. 또 전의 세계대전에서는 패배의 장소가 되었다. 이 건은 후반에 접하기로 하자.
회령(会寧) 상류의 두만강(豆満江). 강의 양측은 북한령과 중국령. 이 강이 문제로 현재의 "탈북자" 북한으로부터 비밀 탈출의 루트가 되어 있다. 일본 시대에는 간단하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일본 패전 되어 옛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은 본인의 희망으로 중국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대단한 인생이었다 생각한다. 처음은 조선인 다음은 일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중국인. 그러니까 그들 연배자는 3개국어의 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한국 전쟁의 때에는 주로 중국군 지원병으로서 조선에 출정 한 것 같다. 지원의 상황은? 그 때는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일본이기도 했을 것이지요. 전쟁중에 소년병(少年兵)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予科練) 전차병(戦車兵)에 갔을 것이지요?」. 이것은 거짓이 없는 회화였다. 이 일문을 취해 봐도 역사에 번농된 백성이 또렷이 느껴진다. 우리 일본은 떠돌이의 백성에게도 안 되었고 국적이 변경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나마 불행중의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사처의 자택은 비행장 부근이었다. 그 당시 지나사변(支那事変)이 발생했다. 아이의 눈에도 이것은 사변이 아니라 전쟁으로 보였다. 연일 상당수의 군용기가 상공을 통과하거나 비행장에 착륙하는 것도 다수 있었다. 당시의 비행기는 2매 날개가 주역을 근무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투기가 주력으로 엔진 발화는 현재와 같이 스윗치 일발이라고 할 수는 없고 여러명으로 목제의 프로펠라를 회전시킨다. 엔진이 걸리면 프로펠라가 불과에 회전을 개시해 정비병은 재빠르게 퇴피한다. 어느 때 낯선 대형기가 착륙했다. 게다가 엔진이 4개 첨부. 어쨌든 거대하게 보였다. 게다가 본 것은 그 때의 1회만. 너무 성능이 좋지 않아서 사용 기간도 짧아서 양산되지 않았던 것 같다.
반년 지나 또 이사. 이번은 압록강(鴨緑江) 부근이다. 부근은 직전(稷畑)이 점재해 일본인의 가옥도 이곳 저곳에 보여졌다. 야간은 지금에 말하는 납치가 때때로 발생하고 있던 것 같아서 주의는 하고 있었다. 어느 야밤중 큰길을 다수의 사람들이 행진. 일본어는 아니지만 무엇인가 군가풍의 노래를 합창 하면서 떠나 간다. 잠시 후 이번은 일본 경찰관인 것 같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오른다. 그들을 쫓고 있다. 총성도 귀에 들려온다. 이튿날 아침 압록강의 강가에는 다수의 시체가 보여진 것 같지만 신문에는 이 사건은 일절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도당을 짜 행진하고 있던 것은 단순한 도둑은 아니고 조직화된 반일 유격대의 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들은 토벌대에게 추적되면 만주 방면이나 러시아 방면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치안 불안정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게 당국에서 묵살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근처의 집은 중국인(당시는 만주인, 또는 니이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현재는 볼 수 없지만 거기의 주부는 전족(낡은 습관으로 도망을 저지하기 위해서 갓난아이 중에서 발부리를 옷감으로 묶고 어른이 되어도 성장하지 않는 다리)이므로 온전히 보행할 수 없다. 그러나 나를 보고 언제나 싱글벙글. 본래라면 근처의 사람이기 때문에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는 거의 인사는 하지 않는다. 물론 말의 관계도 있었지만 일본인이다고 하는 교만도 있던 것 같다...
신의주(新義州)의 인구는 당시 10만명 정도 있던 것은 아닐까. 그 중 일본인은 아마2~3만명 정도는 아니었던 것일까. 현재는 크게 변모해 약 31만명. 대안의 안동(安東)은 40만으로부터 무려 200만의 대도시에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조선인은 3,000만(현재는 6,000만)이라고 말해졌던 시대로 일본의 총인구는 각 식민지를 종합 해 1억이라고 말해졌던 시대 였다.
일본과 중국의 충돌이 확대해 왔다. 일본에서는 지나사변(支那事変)이라고 말했지만 중국측은 중일 전쟁과 본격적 전쟁이라고 표명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라 신의주(新義州)도 육로 병사 수송의 중요 지점이었으므로 연일과 같이 일본 육군 병사의 열차가 통과한다. 거주의 일본인은 초등 학생으로부터 어른까지 최대한으로 동원되어 환호성으로 병사들을 전송했다. 대부분의 일반 병사는 화차에 짚을 깔아 군마와 함께 자고 일어나기 하고 있었다. 곁에서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히로시마(広島) 출신으로 농가의 아들이다. 아이는 없다. 우리 몸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내는 일단 친가로 돌아갔다」. 그 한마디는 몇 십년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 놀이라고 하면 이른바 군인 놀이. 4~5사람으로 군인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유행 완구의 권총을 지참이다. 전방은 오가와가 흘러 그 전에는 신의주 중학교가 있어 교정에는 반 썩은 날개 2매 의 전투기가 참고품으로서 상시 전시되어 있어 아이에게 있어서 절호의 놀이터다. 그러한 환경이니까 군국 소년에게 있어서는 놀이에 싫증 하지 않는다. 부근에 있던 친구가족의 부모가 부재 때. 이것 다행히라고 오두막 부근의 목상을 이용해 진지 만들기. 우연히 거기를 지난 2명의 조선 아이에게 빵 빵. 그들은 격노해 불명한 조선어를 외치면서 달리고 도망친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답례가 왔다. 처음은 10명 정도 먼 곳에서 무슨 일인가 외치면서 투석이 개시되었다.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때가 지나는 것에 따라 인원수가 증가. 마지막에는40~50사람 정도 있었을 것인가. 안에는 완전히 무관계한 중국인 러시아인의 그림자도 하나둘씩. 당시의 국제 정세를 아이의 세계에 반영한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투석. 5명 밖에 없는 친구 전원이 떨려 오름 "그것 숨어라" "저쪽은 괜찮아".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거기에 온 일본인 경찰관이 4명 확성기로 위압한다. 그들 민족의 일본인에 대한 본심을 노출로 해 버린 것 같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친척 친구 지인 중에는 일본 제국의 희생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것이 이상하다.
봄의 황혼 자택으로부터 바라보는 압록강(鴨緑江) 호반의 경치는 당시 일견의 가치가 있었다. 일본 본토의 시모노세키(下関)로부터 부산(釜山)까지 8시간. 연락선은 8000톤 흥안환(興安丸) 금강환(金剛丸) 4000톤의 기쁨과 경복환(慶福丸)과 특수환(特壽丸) 있었지만 패전 후도 활약한 것은 예의 시베리아 인양선으로 활약한 흥안환(興安丸) 밖에 모른다. 부산에서 잔교 직전의 북경행의 급행열차에 승차해 경성(京城) 평양(平壌) 신의주의(新義州) 대교를 지나면 만주국이다. 점등한 대교를 붉은 석양을 키에 받으면서 일본인 조선인도 간단한 통관으로 질주 하는 저 쪽의 당시 만주국 5족공영기(五族共栄旗)아래에 간다. 이른바 일(日) 만(満) 몽고(蒙古) 지나(支那) 그 외로 왕도 낙토가 항상 슬로건이 되고 있었다. 군대는 따로 해 개척 농민만호개척 의용군 이른바 무장 농민도 이송되었지만 그것은 반복하면 현지의 농민으로부터 무료와 다름없게 농지를 몰수한 사례이며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군국주의에 세뇌되어 모두가 정당 행위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철교 이동 도만 하는 사람들 거기에 붉은 석양이 중복 해 그림이 되어 노래의 하나도 나오자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유격대안에도 일본인이 같은 종류로서 전열에 참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이것은 정말로 있던 노래야」라고 배웠다. ”두만강(豆満江)에 내뿜어라 오오 일장기를 바꾸는 강도 모두!” 전문은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모르는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북한의 배가 마약 운운이라고 말해지지만 이것에 대해 조금 짐작이 있다. 아마 신의주 교외였다고 생각하지만 드문 꽃이 이곳 저곳에 피어 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무슨 꽃 이냐고 현지인에 물으면 「이것은 양귀비의 꽃(芥子の花)」라고. 「감상용의 꽃도 있지만 이것은 그다지 좋지 않는 꽃이다. 그러나 소량이니까 좋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게」. 마약의 꽃이라고는 발설하지 않았다. 상상하는데 혹시 북한은 마약의 재배에 적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꼭 그 시기. 아마 1934년 정식적 무선국이 개설되어 그 초대 국장에 아버지가 임명되었다. 당시의 무선국은 최신예의 정보 기관이며 마을을 올린 환영 무드 일색이었던 기억이 있다. 건설 도중 부모 에 이끌려 몇회인가 본 기억이 있다. 몇 개인 가의 몹시 높은 무선탑. 물론 송수신의 관계로부터 부근에는 거의 인가는 없다. 그곳의 지명은 빈포우동(ビンポウ洞)이라고 말했다. 당시 유행의 "소년 클럽" 또는 "유년 클럽"의 책을 안아 견학했다. 그 때 아버지는 「너가 가지고 있는 책은 1엔50전이지만 조선인의 어른이 하루 일해 50전 밖에 되지 않는 것이야」라고. 그것을 들었지만 겨우 유년기를 빠져 나간 나에게는 큰 일이다고 하는 감각 밖에 없었다. 당시의 아버지는 40세 전반. 무선국 개설 당일은 물론 군,관,민을 앞에 둔 개장. 그 제일 톱의 책임자인 아버지가 연단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설을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 연설의 연습이다. 연습은 약1개월이나 매일 저녁과 같이 끝없이 연속했다. 그것을 관찰하고 있던 어머니는 「태도가 나쁘다. 손의 놓아 둔 장소가 좀 더. 그 즈즈변(ヅーヅー弁) 섞여서는 대중으로부터 의미불명 하게 놓친다」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고치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난문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당일 아버지가 회장 연단에 등장한 순간 상공에서는 육군 그리고 민간기가 난무 해 경품포함의 낙하산을 투하. 회장에서는 지사 시장 장관 세관장 비행장장 그 외로서는 경찰 군대의 일부 그리고 여러 가지 관청의 사람, 실업가. 그런 분위기가 증대되는 군악대의 연주. 그러니까 실패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일년 후 또다시 전근의 명령이 내렸다. 전근지는 최북단의 신의주(新義州)로부터 일전해 조선에서도 최남부의 부산(釜山)이었다. 거기에 따라 근친의 국원이 재삼 야간 방문해 「 나도 우리도 국장의 추천으로 부디 남을 희망합니다!」라고 간절히 원한다. 여느 때처럼 주연 된다. 벽의 저 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리는 「그런가 잘 알았다. 나쁘게는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전근으로 출발하는 역 앞에서는 가능한 한 다수의 사람들을 모아 만세 삼창을 외쳐 주어」. 인간 본능의 대욕이 얽힌 거래였다. 무렵은 9월 중순 북국이었으므로 한기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역 앞에는 무수한 전송하는 사람들. 예의 만세 삼창은 재삼 말해졌다. 서로의 요망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들은 눈에 손수건을 맞히고 이별을 아까워했다. 이상했지만 군복차림의 병사는 안보였다. 이른바 일본인과 일반 조선인의 잠깐 안정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남부행을 희망한 사람들도 대부분이 희망을 실현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70년전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아인 채 쭉 패전까지 거주하고 있던 사람은 판단력도 없고 상당한 사망자 그리고 행방불명자가 속출해 그 무선국원도 시베리아 보내가 된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은 돌아 온 후, 아무런 통신도 없었다. 반대로 남부의 무리는 어떻게든 무사하게 생존할 수 있던 것 같다.

부산 무선국
부산(釜山). 일본 시대에는 후잔. 현재는 부산이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関)까지는 210킬로미터의 거리이다. 동래(東莱)라고 칭해 일본인의 찻집이 채를 늘어놓았던 시대도 있었다. 당시 부산으로부터 동래까지 단선의 전철이 운행해 길은 시골길이었다. 그리고 해운대(海雲台)도 있어 오락이기 때문에 소형이지만 온수 풀도 있던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환락가를 겸비한 도시화가 진행되어 옛 모습은 없다. 조금 떨어져 있지만 낙동강(洛東江)은 거대한 잉어가 생식 하고 이것을 기른다. 가 큰 것이 되면 3다다미로부터 4다다미만한 크기로 이것을 생선회에 붙인다. 소스는 조선 된장이 좋은 것 같았다. 그 한국 전쟁 당시는 북조선군이 이 낙동강 변 까지 내습해 부산도 함락 직전이 된 역사가 있다.
북국의 신의주(新義州)에서 남단의 부산(釜山)에 전학간 초등학교는 지금에 말하는 영도(影島)에 존재하고 지도에도 기재되어 있는 제4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 4학년의 담당 선생님은 당시 28세. 지금도 기억에 잔류하고 있는 선생님의 한 사람으로 있다. 성은 후리(堀) 출신지는 니가타현(新潟県)이었다. 당시 유행의 군국주의의 풍조가 들어가 있던 선생님이지만 이른바 샐러리 맨의 선생님은 아니고 현재는 너무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교육에 대해서는 정말로 열정 넘치는 지도로 특히 역사 교육은 지금도 훌륭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시국에 따라 선생님 그 자체가 군국주의에 세뇌되고 있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는 까마귀가 많은 지방이었다. 이 학급은 본래 일본인만 학생이었지만 그 중에 두 명의 조선인의 학생이 재적하고 있었다. 그러한 학생이 무엇인가의 사정으로 결석했을 때에 한정하고 선생님은 외친다. 「모두 그 하늘을 봐라! 이전에는 조선까마귀만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이 까마귀는 몸집이 작고 날개응과 백색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까치이지 않았는지?) 최근에는 본래의 흑 일색의 일본까마귀가 놈 등을 쫓아버리고 있다. 새까지 이러한 응이다! 너희는 훌륭한 일본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4학년이 되면 나무총을 들고 군사 교련이었다. 때때로 시 전체로 군사 퍼레이드도 있었다. 초등 학생으로부터 성인인 백화점의 점원까지 독자적인 군복차림. 이것은 맑은 하늘 뿐만이 아니라 빗속도 당연한 결행이었다. 그것이 종료하면 일장기의 작은 깃발을 털어 출정 부재중 가옥을 둘러싸 만세 삼창이었다. 이만큼 다수의 일본인이 주거 있어 아직도 개전 전 이었으므로 화려함이라고 할까 군국 투성이라고 할까. 1938~1940년경의 부산에서는 특히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이러한 기초가 충분히 육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무모의 전선에 젊은이들은 아무 저항도 없게 나와 갔던 것이다.
가라사대" 일본은 신의 나라이다. 일본은 동아의 맹주. 주인공이다. 너희들은 뭐라고 훌륭할 때에 태어난 것인가"라고
그 영도(影島)로부터 부산(釜山)항이 일망 천리 그것은 광대한 파노라마 모양이라고 말해도 이존이 없는 풍경이었다. 관부연락선(関釜連絡船)의 출입이라든지 각종 대소 선박의 무리 등은 통상 익숙하고 있었지만 있을 때 당시로서는 때인 듯한 대형선이 입항해 왔다. 야간이 되면 마스트 가득하게 이른바 만함식(満艦飾)의 점등이었다. 그 배의 선명은 키미카와환(君川丸). 총 톤수 6863톤. 원래 외국항로가 주요했던 것 같다. 무선기의 고장으로 긴급 입항해 온 것 같다. 무선이 불통이라면 맹목도 동연. 그 수리라고 해도 이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시모노세키시(下関市)에는 그 기술자가 개업하고 있던 것 같지만 그것이 부재. 그 때문에 무선국의 존재하고 있는 부산에 수리를 목표로 해 입항이었던 것 같다. 선장이 평신저두 이 건을 의뢰해 무선국을 방문해 왔지만 일반 국원은 통신만. 당시라고 해도 고등 수학을 구사한 수리를 필요로 하므로 해당자는 아버지 밖에 없다. 「그것은 곤란했다」라고 귀가한 아버지는 말했다. 수리에는 3일은 걸리므로 당시 본성이 있던 경성(京城)의 본국에 연락했다. 옛날도 지금도 이러한 건은 부업에 유사하고 있으므로 사전의 이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이 수리비는 뭐라고 1500엔이 시세였던 것 같다. 덧붙여서 초등학교의 교장의 월급이 100엔대 때 이다. 아버지는 돈은 받을 수 없는 이라고 거부했으므로 그러면 물건으로 라고 대형의 고등어를 300마리 정도 관사에 반입해 왔다. 그 분배이지만 국원과 그 가족 전원에게 공평하게 분배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후일 생겼다. 이 고등어를 충분히 받았음이 분명한 있는 국원이「아내가”이렇게 매일 매일 고등어만으로는 질린”」라고. 이것이 풍문에 아버지의 귀에 들려왔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 「이 내가 그 높은 곳의 위험을 범해서까지 마스트에 오른 고생도 모르고!」. 또 어떤 때에는 포경선의 무선기도 수리해 그 때는 완전히 경악 했다. 1입방 미터의 고래의 붉은 살코기. 그것이 3개였다.
그때 부터 수십년. 부산은 한국이 되어 예의 키미카와환(君川丸)은 그 후 특설 수상기 모함으로 변신해 수상 정찰기4기 관측기6기 탑재 북국의 아류살의 키스카 시마카타면에서 활약했지만 1944년 10월 23 일·미 잠수함의 공격에 의해 최후를 이룬 것 같다. 저것도 꿈 이것도 꿈 지금은 아는 사람도 전무가 되어 버렸다.
부산시(釜山市) 중심부의 북측 그 유명한 용두산(龍頭山)의 최상부에는 도쿄 타워는 아니고 부산 타워가 있어 부산 명물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것과 동시에 옛날 토요토미 히데요시 군세와의 싸움으로 역사에 유명한 귀갑선으로 직면해 토요토미수군을 격파한 이 장군(李将軍)이 당당히 서서 바다의 저 편을 응시하고 있는 동상도 건립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후의 일로 옛날은 역사에 시달렸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구한국의 말기에 대원군(大院君)이 외국인의 입국을 싫어해”洋夷犯非戦則和主和売国”(외국인이 침입하면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매국노다)라고 말하는 어려운 지시가 있던 것 같다. 그 후 일본 시대가 되어, 거기에 용두산 신사를 건설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전성으로 이것에는 깊은 추억이 있다. 저것은 1940년의 한 여름 「기원은 2600년, 진무 천황(神武天皇)로부터 기산해 2600년에 해당한다」라고 칭해 전국 그리고 당시의 일본 식민지에서 이것을 축복해 해외의 각국 원수도 도쿄에 참집해 거국적으로 성대한 축전을 개최했다. 노래에도”기원 2600년. 아아 1억의 가슴은 운다”라고. 정확히 그 시기 미리로부터 대망의 일본호 그리고 카미카제(神風)와 이름 붙여진 전투기가 완성. 도쿄 런던간의 무착륙 비행에 성공해 점점 기운은 분위기가 살았다. 나 자신도 학교 대표의 일원으로서 그 성공의 기원을 위해 참가했지만 극단적인 혹서 때문에 의식을 잃어 실신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성공을 위해 전국에서 불려진 노래의 일절”우리 일본은 하늘을 난다. 6만 킬로를 전속력으로. 하늘을 난다” 그때 부터 수년 후 한국 독립, 신사 말소 ,일장의 악몽화해 버렸다. 이것이 역사라는 것일 것이다.

용두산 신사
용두산(龍頭山)을 지나 대교의 조금 앞 물론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나타내고 있는 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백색의 6층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화신(和信)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당시 그대로의 같다) 당시의 내부의 모습은 현재와 별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어쨌든 군국 시대였으므로 비상시 일본을 상징하고 있는 전시회가 때때로 개최되었다. 방독옷, 그 체험실 등등이 있었다. 자택으로부터 도보로 30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으므로 휴일에는 친구와 거기에 나갔다. 정면 현관의 개폐문은 자동이 아니고 수동이었다. 그리고 선전을 위해서인지 당시로서는 개발한지 얼마 안된 형광등이 자랑스럽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현관문의 개폐이지만 이것은 손님이 개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10세 정도의 두 사람이 제복을 착용해 종일 문의 개폐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령은 그들과 큰 차이 없었기 때문에 절호의 놀이상대다. 그들의 측에 몇명의 친구가 줄서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라고 몇번이나 반복한다. 출입하는 부인들은 입을 눌러 웃으면서 달려 통과한다. 몇회인가 반복하면 그들의 양상이 험악하게 되었다. 돌연 흐느껴 울면서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의미 불명의 조선어로 달려들려고 한다. 그것을 헤아려 우리도 해산했다. 우리가 나쁜 것은 십이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어 재차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거기를 통과할 때도 거리를 멀게 해 지나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 생활고를 위해서 부모에게 명령되어 이 일에 종사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이것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린 날의 괴로운 추억 그리고 마침내는 반일의 요소의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아 보면 정복자인 일본인이 보면 하찮은 이러한 사소한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미나카이(三中井)를 지나 대교를 건너면 서방 이것 또 어항에서 당시 미나미하마쵸(南浜町)라고 칭하고 있었다. 여기는 100퍼센트 일본인의 마을이었다. 때때로 어항을 탐색한다. 안벽에는 어느 쪽도 전망대를 설치해 통상보다 선폭이 극단적으로 넓은 어선이 작은 해협이 비 좁아서 답답해 보이도록 늘어서 있어 그 안벽 부근을 때때로 펑펑 선박 기관의 소리를 발하면서 자동차가 느슨한 속도로 주행한다. 저것은 무엇이야? 회답에 의하면 「자동차의 엔진 부족을 위해 선박의 엔진을 달고 있다」라고. 그때 부터 수년을 얻지 않고 패전이 되어 전부 돌아온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은 나가사키현(長崎県) 출신자가 대부분으로 어선 통째로 탈출. 그러니까 전촌 귀한자의 마을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귀에 들려왔다.
일본 시대에 건설된 다리의 정식명칭은 영도대교(影島大橋)라고 하지만 편리 아주 도와 지금도 당당히 살아남고 있다. 거기에 비교해 용두산 신사(龍頭山神社)는 일본 패전 직후에 흔적도 없게 파괴 소멸되었다. 저기는 조선 정부 시대로부터도 와 이전보다 역사가 있어 이른바 성지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 한국 출병의 시 일본수군을 깬 사례는 일본에서도 주지하고 있다. 그 거북선의 이 장군(李将軍)의 동상은 현재도 예 봐를 효과가 있게 해 당당히 서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지의 일부다. 일본 시대에는 그런 일은 1 파편이나 없었다. 당연히 형편도 나빴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반대로 일본의 성역을 철거해 조선의 종교적인 건조물이라든지 조선에서는 위인의 동상을 지으면 일단일 있는 경우에는 즉시 소각 파괴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은 두다. 이것은 유럽의 경우 종교전쟁까지 발생하고 있는 역사가 재삼 있어 지금도 중근동에서도 전란이 언제 끝날 것도 없게 계속하고 있다. 일본 시대에는 강제적으로 신사에 참배시켰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학우 물론 일본인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 신자였던 것 같다 「왜 신사에 참배해야 하는 것인지?」 일본인이어도 이 같았다. 타민족을 정복 또는 병합 하는데는 민의가 없으면 용납하지 않다. 현재의 의회제도와 같은 형식으로 하면 어떻게든 몇분의 일에 따르는 것 아니었나. 그것을 일부의 지도자가 독자적으로 결정 실행하면 반발은 당연하다. 그것이 대대부모로부터 아이에게라고 말하도록 구전되어 그것이 민족의 체질의 일부가 되는 것은 우리 민족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다.
창씨개명(創氏改名 : 선조로부터 계승해 온 조선의 이름을 일본식의 이름으로 바꾼다). 이것은 동화 정책의 일단이었다. 당시 나의 견문에 의하면 일본인과의 혼합의 중학생은 틀림없이 일본식에 개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시의 국책(조선 총독의)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개명한 이유가 있지만 일반 서민은 어떠했는지. 이 개명을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불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대로 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또 일본어를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은 조금 상위하다. 패전까지 라디오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조선어의 방송도 실시하고 있던 것은 저자 자신이 이 귀로 듣고 있다. 그리고 조선어와 조선 문자. 우리는 이것을”온몬”이라고 말했지만 일부의 대학에서는 이것들이 필수과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에는 문어문과 구어문의 읽는 법이 있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려웠던 것 같다. 한층 더 그들의 말에는 이른바 탁음이 없는 동일하다. 예를 들면, "全然"를 그들은 첸첸, "馬鹿"를 파카라든지 "日本"을 리혼이라고 하는 것으로 예를 쓰면 끝이 없다. 그들은 자택등 에서는 조선어 공식의 장소에서는 일본어로 항상 2개국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우리 일본인은 일본어만. 그래서 부자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일한을 포함해 과거의 역사를 모르는 지금의 젊은이는 확대 해석해 조선인의 대부분이 개명했다든가 조선어를 말소하기 시작했다든가 반일적인 조선인이 주창하는 것은 원래 반일이 근저에 있는 것으로 식민지 시대의 일본 시대를 모두 대변도 된장도 함께 해 주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 안에도 동일 생각으로 외국을 점령했다든가 혹은 일본 군벌이 조선의 수목을 벌채했다든가 과거의 대조선 정책은 에도시대의 악대관 같은 수준으로 나쁘다고 생각하는 무지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이기면 관군 지면 적군의 상징적인 표현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지금도 양국간에 문제가 되어 있는 위안부의 명칭. 이것은 전후 그야말로 창씨 된 말로 전쟁 전에는 없었던 말이다. 언제 발명되었을 것이다? 라고는 말해도 일본측에서도 부의 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바보취급 한 가볍게 본 생각이 아직도 조선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습관의 상위 서로의 착각등 이것들 난해의 여러 문제는 언제의 날이나 화해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타민족이 주권국의 말을 습득하는 것은 상당히 우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국의 예를 본다고 영어. 저것도 통하려면 통하지만 방언이라고 할까 와라고 할까 홍콩에서는 홍콩 영어 인도에서는 인도 영어 싱가폴에서는 싱가폴 영어 그 외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해협 식민지 영어등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패전이 되지 않았으면 조선에서는 조선방언의 일본어가 있었을 것이다 해 만주에서는 만주방언의 일본어 대만에서는 대만방언의 일본어가 난무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수업의 시간으로, 이 문장을 읽으세요 라고 지명해 된 학생은 조선인의 학생. 「加藤せいしょうは やぶれだけのいきおいで あきらかに近づいた」. 듣고 있는 우리는 무슨 일일까 의미 불명? 일본어에서는 토요토미군(豊臣軍)이 한국 출병의 절이지만「加藤清正は破竹の勢いで明に近づいた(가토 기요마사는 파죽지세로 명에 가까워졌다)」. 단지 이만큼의 문제이지만 그러니까 그들은 일본어를 암기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관공서 공공 시설등 모두 일본어 표시.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도 앉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 여러가지 악조건에 의해 희망도 꿈도 소멸한 구한국 고관은 은둔자가 되어 심산 등 사람의 없는 산속에서 일생을 끝마쳤다는 이야기는 몇회 인가 귀에 들려왔다. 방관자 일본인은 몰랐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을 원망해 땅을 두드리는 그렇게 해서 일본 문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진동시킨 일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조선 문자 전통까지가 말소되는 것에 동일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선의 언어 이름까지 일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본 정부를 위해 지위를 잃은 사람들 그 친척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말에 힘쓸 수 없을 수록 분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습관의 상위. 예를 들면 구한국에서는 지폐는 아니고 화폐가 주로 유통하고 있던 것 같지만 우리도 익숙한 것이 있는 구멍이 열린 에도시대 화폐의 하나와 큰 차이 없는 화폐로 그 때문에 중량도 있으므로 그것을 운반하는 업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본 시대가 되어 지폐가 주된 금전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운반 업자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이것도 반일의 원인이 되어 있던 것 같다. 그 외 우리 일본인에서는 이해 불능의 문제도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화폐 운반이라고 하면 그것에 관련되는 이야기가 있다. 타이쇼(大正)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후 세계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조선 거주의 일본인등은 부산시(釜山市) 서방에 있는 진해(鎭海)에 당시 벌써 일본해군의 거점이 있어 그 시설이 한층 확대한다는 것으로 나도 나도 라고 성공을 꿈꾸어 집결했을 뿐은 좋았지만 그 소문과 반대로 군축의 결과 시설을 축소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대한 사람들은 큰 일이었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니도 부모 에 이끌려 재기를 기대하고 제주도(済州島)에 가 부모는 약의 행상까지 한 것 같지만 그것이 번성. 시골에 갈 때에는 몇명의 조선인 부인을 동행시켰다. 왜냐하면 조금 전도 말한 것처럼 당시는 화폐가 횡행했던 시대였으므로 필요를 느껴 그 짊어져 역을 데려 갔던 것이었다. 반복하면 병합 직후는 조선의 보건 위생은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던 것이다. 또 있을 때 어머니의 부모가 점포 앞으로 의치를 청소하고 있으면 부근의 조선인이 모두 한결같게 「괴물이다」. 병합 직후는 이런 느낌이었다.

당시 유통하고 있던 화폐와 지폐
부산(釜山)의 대교를 도보로 왕래했지만 그 다리의 소매 그리고 중간 지점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보여졌다. 우리는 통칭”mon chang”라고 애칭이라고도 별명과도 모르는 명칭을 붙이고 있었지만 그러한 사람들 물론 조선인이었지만 보통과 다른 것은 나병 지금에 말하는 한센씨병(ハンセン病) 환자였다. 무너져 썩는 몸을 가리는 고물옷감 방울져 떨어지는 그 몸 국물이라고 말할까.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들도 생명이 있는 한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모습으로 앉고 양손을 내밀어 일본류라면 「 오른쪽이나 왼쪽의 남편분. 제발 베풀어 주세요」그것이 당시의 조선식에서는”일전(一銭) 나고”라고. ”그 사람의 국물이 걸리면 감염한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 병은 당시 대륙에서는 풍토병으로도 되어 있던 것 같다. 일본에서도 그것에 관련되는 이야기로 그 토요토미(豊臣) 시대에 조선 침공한 그 무장의 일원인 오오타니(大谷)가 이 난치병에 걸려 귀국했지만 그 보고를 위해 히데요시에 배 알현했을 때 수고였다라고 히데요시가 오오타니에 잔을 내미는. 오오타니 그것을 단번에 다 마시는 것과 동시에 방울져 떨어지는 병의 국물이 들어간 잔을 히데요시에 반배로서 내미는. 히데요시 전혀 신경쓰지 않게 그것을 마신 이야기의 일절이 있던 정도 옛날도 나병은 만연하고 있던 것 같다. 그것을 보니 아이라도 불심으로 가끔씩은 적은 용돈의 일부를 할애하고 전을 던진 기억이 있다.
그래서 조선총독(朝鮮総督)은 1915년 한반도 남동 정식으로는 전라남도(全羅南道)의 인접하고 있는 소록도(小鹿島)에 소록도 후생원(小鹿島厚生園)을 설립했다. 설립 이전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세들이면서 광주(光州) 부산(釜山) 대구(大邱)등의 각 도시에 존재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병은 통상의 병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평생 격리 금종 수술. 이것은 당연이라고 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최근 국내에서도 한센씨병(ハンセン病) 사건으로서 인권 무시를 포함해 정부가 진사한 것은 신문 그 외로 아시는 바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병합 직후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초로 의사를 다수파견 했다. 거기에 간호사 조산부를 양성했다. 종래의 한국에서는 의료 기관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또 식림에 힘을 썼다. 원래 조선 만주 등은 수목의 성장이 일본과 큰 차이 있어 이른바 송림은 있지만 잡목은 극단적으로 적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전 국토에 대해 식림도 중요한 항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 되어 일본군이 벌채했다든가 식림 등이 전무했다든가 하는 판단착오도 심하다. 거기에 성장이 얼마 안 되는 수목을 온돌(마루밑에 불을 통해 난방 한다)에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인가 부근에는 만족하게 수목이 성장할 틈이 없었던 것이. 일본 패배 후 한국 정부가 그 대책에 고심해 회양목이 적당이라고 보고 그것을 식림 한 것은 좋았지만 성장하는 것에 따라 그 가시가 문제가 되어 이번은 제거하려고 한 경과가 있다. 그리고 교육의 문제. 한일합방 이전에는 문맹이었으므로 일본 본토보다 훌륭한 학교를 건설했다. 패전전에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에게는 짐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좋은가 나쁜가 일본어의 읽고 쓰기가 연배자는 할 수 있다.
이런 일로 일본인 학생 일반민 까지 식림에 동원되었다. 어머니도 식림을 했기 때문에 허리를 다쳤다. 당시 표의 도로를 통행중의 조선인에 무엇인가 약간의 용무를 의뢰하면 특별히 용무가 없으면 대체로 요망에 따라 주었다. 우연히 통행중의 아줌마에 요통의 맛사지를 의뢰한다. 알았다. 나의 어머니와 동년 정도. 아마추어인데 성의를 담아 맛사지 해 받고 있는 한중간에 나의 어머니는 감사를 재삼 말한다. 그 때 아줌마 안심했는지 자신의 전반의 인생을 이야기 냈다. 「 실은 한국 정부 시대에는 나의 아버지는 재판관이었다」. 그렇게 해서 눈물을 흘려 「 나는 이렇게 영락해 버렸다」. 작은 소리의 울음소리로 고개를 숙인다. 심정은 충분히 알아 어머니도 동정 무성. 아이였던 나도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까지 조선인에 다양한 조선의 나라의 역사를 배운 적도 있었지만 환청으로 흘려 듣고 있었다. 그 반대의 사례로 패전 귀환자가 외지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해도”외지에 간 사람들은 군의 배경으로 맛있는 국물을 빨아들이고 있던”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신다. 군의 강력한 지원아래에서는 위험도 있었지만 묘미도 충분히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조선 근처는 일본 본토라고 보여지고 있었으므로 일본 본토와는 각별한 좋은 지위라든지 특별한 재력이 있던 것도 아니다. 월급쟁이는 학력, 상인은 재력 이것은 어디에 가도 같았다.
단지 중요한 재력이지만 예를 들면 급여는 일본인의 7할 게다가 격렬한 시험을 돌파한 합격자로 한정된다. 물론 일본어의 회화 등 충분한 사람이다. 이 시험은 화이트 칼라족의 심사 시험이며 따라서 이것에 새어 이른바 인텔리 계급자는 단순 노동은 하고 싶지 않은 적합하지 않다고 일반적으로는 가능한 한 봐 준비는 훌륭하게 해 브로커적인 장사를 실시하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좋은 정보원으로서 가능한 한 상층의 일본인과 항상 접촉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최선의 사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도 거기에 준한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이런 김(金)씨 오래간만이었지요」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아니 조금 여행으로」. 얼굴이 조금 야윈 것 같다. 당시는 전시하에서 경제 통제는 극단적으로 어려웠다. 예의 암거래 거래다. 거기에 걸리면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도 같은 죄인 것 같지만 거기는 숟가락 가감으로 미묘한 점. 김씨도 이것에 걸려 조금의 사이 잡히고 있던 것 같다. 어느 때 부근의 저명인인 윤(尹)씨가2~3사람으로 당시로서는 귀중품인 쌀을 상당양 지참해 왔다. 그들은 「 나의 외아들은 도쿄(東京)의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의 2년생이지만 조금 이상한 일을 해 체포되어 도쿄의 구치소에 들어가 있다. 어떻게든 도와 주세요」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아버지도 곤혹했지만 당시로서는 거액의 금전을 내민 것 같다. 1938년 무렵의 금액으로 500엔. 어떻게 될까 이것은 내기다!라고 아버지는 외쳤다. 최종적으로 이 아들은 20일 정도 해 무사 석방된 것 같다. 이야기에 의하면 조사의 검사에 지금에 말하는 접대의 연속. 그리고 뇌물을 보냈던 것이다. 귀가한 아버지는 받은 500엔을 다 써 버리고 있었다! 거기에 비교해 이 일가는 희색 만면. 일족 전부 환영 일색이었다. 그리고 1년 후 우리 일가는 전근. 물론 「절대로 잊지 않으니까」라고 말해졌다. 그때 부터 50년 후 어머니가 아직 건재의 무렵 재차 이 땅에 왔지만 짐작의 장소는 도로가 각처에 신설되어 자택은 물론 윤씨 일족 가옥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50년의 세월은 모두 지워졌던 것이다.
1939~1940연 5월 27일(해군 기념일) 부산항(釜山港)에 일본 연합 함대의 웅자가 입항. 나가노(長野) 해군 대장을 장으로서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 잠수함 그 외 여러가지 함정의 큰 떼. 해협만을 끼우고 무수한 일본인 조선인들이 구경. 모함으로부터 발진한 뇌격기(당시는 부산에 비행장은 없었다) 모의 어뢰를 안아 발사의 몸의 자세에 들어간다. 해면 아슬아슬하게 강하하면 프로펠라의 풍압으로 해면이 떨리면서 큰 파도를 일으킨다. 발사. 보기 좋게 명중. 그것도 무슨기도 이다. 신과 같은 기술로 밖에 비유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모양은 연합 함대의 위용을 보이기 위해 주된 항구 예를 들면 대련항(大連港)에서도 실시한 것 같다. 그 시점이 군국 일본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
당시 부산에는 일본인만의 초등학교가 24교 있어 그 학교명은 제1초등학교로부터 순서를 쫓아 제24초등학교까지 실재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해서 소아들의 성장은 한결같게 모자 대신에 철모 거기에 늠름한 군복을 몸에 감겨 군도를 허리에 늘여 차 내려 그야말로 군국 소년풍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수년 후, 무모하기 그지없는 전쟁의 결과 일반 서민은 전부 여기로부터 퇴거 당해 그 위용을 자랑한 함대는 전멸 지휘관 나가노(長野) 해군 대장은 도쿄 재판으로 종신 금고에 처해졌다고는 아무도 몽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차 부산을 방문한 때 군국 소년의 검에 인상 지어지고 있던 50년 전의 항구가 방불로서 떠오른다. 그런 일 이제 와서 생각해 내도 어쩔 수 없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항구의 체질 군중의 활기차 같은 산이나 강 저런 일 또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예의 명곡 아라키의 달(荒城の月)이 웬지 모르게 뇌리에 속삭이는 것이었다.